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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Nov 05. 2024

이 접시에 꽃을 놓은 이유는 뭔가요?

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두 번째 주의 기록


마음의 수평선


‘걷는 여행’ 두 번째 주. 치앙마이 올드타운에서 맞은 첫 아침. 지난 한 주와 다름없이 노트북을 챙겨 부지런히 길을 나섰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자동차, 빨간 자동차. 여름의 빛이 매만진 이토록 찬란한 빛깔들. 마음을 빼앗겨서, 고작 몇 걸음 걷는 데 한참이 걸린다.



목적지인 식당 앞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다. 대기표를 받았지만, 대기석까지 벌써 꽉 찼다. 직원에게 물으니 내가 식사할 차례가 돌아오려면 40분 정도는 걸릴 것 같단다. 천천히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기에 딱 적당한 시간. 밤새 자면서 에너지를 비축하기 때문일까, 아침의 공복은 조금 길어져도 괜찮다. 오히려 좋아! 빈속으로 따스한 볕을 한 시간쯤 쬐고 나면, 비어있던 몸에 여름의 햇살이 가득 들어찬 것처럼 기분 좋은 활력이 반짝인다.


아침을 먹을 식당이 제법 큰 도로변이다 보니, 느긋하게 걷기엔 너무 번잡하고 매연도 많다. 5분 정도 걸었을 즈음, 쉬어가라는 듯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누군가 큼직큼직한 돌을 깎아 만들어둔 야외테이블과 의자가 나타났다. 투박한 돌의자는 생김새를 보고 어림짐작한 대로 편하지는 않지만, 시원하다. 내가 지금 태양이 작열하는 남쪽나라에 와있구나. 재차 실감하고 있을 때, 어슬렁어슬렁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첫 숙소에서 아침마다 내 다리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어린이고양이처럼, 태양빛에 그을린 듯한 황금빛 털을 가진 고양이.


어디가!? 나랑 놀아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나를 한 번 슥- 보곤 그냥 지나쳐 가버린다. ‘언니랑 놀아줘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살곰살곰 뒤를 쫓아갔지만, 듣는 둥 마는 둥 고양이는 우직하게 계속 제 갈 길을 갔다.  


40분을 기다려 앉은 야외자리. 머리 위엔 태양이 작열하고, 코앞 도로엔 차들이 연신 쌩쌩 지나다니지만, 불평하는 마음보단, 그저 ‘치앙마이구나’ 싶다. 치앙마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지난 일주일 동안, 마음이 맑은 날의 수평선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의미 없는 꽃은 접시에 놓지 말라고 했지만


최근 1-2년 사이에 아침 첫 끼니는 무조건 열을 가하지 않은 야채와 요거트를 먹는 나만의 규칙이 생겼다. 여행을 할 때면 깨지기 십상인 규칙인데, 치앙마이 세 달 살이가 두 번째 주에 접어든 이번 주부터는 절반은 여행자, 나머지 절반은 ‘생활자’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하루의 첫 일과인 아침식사부터 일상의 루틴으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여름의 눈꽃은 여전히 푸르른 잎사귀들 틈에서 빛나고


가든샐러드와 요거트보울을 주문했다. 물 한 병까지 해서 모두 315바트. 이 정도면 치앙마이 물가로 에어컨이 있는 식당의 평균적인 가격인 것 같다.


가든샐러드는 완숙달걀 두 개와 오렌지 몇 조각을 곁들여 나왔다. 첫 끼니로 먹기에 딱 좋은 밸런스. 랜치드레싱이 조금 헤비해 보였지만 뿌리지 않고 따로 그릇에 담겨 나와서 조금씩 곁들여 먹으니 좋았다. 소스로 굳이 맛을 더하지 않아도, 야채 본연의 맛이 좋다. 곰곰이 씹어보면, 다 다른 빛깔과 생김새처럼, 야채도 자기만의 맛이 있다. 어떤 야채는 아삭아삭하고, 어떤 야채는 보들보들하고, 어떤 야채는 달큰하고, 또 어떤 야채는 매콤하거나, 쌉싸름하다. 야채들이 입안에서 연주해주는 싱그러운 아침의 하모니. 씹을수록 각각의 개성은 더욱 섬세하게 미각에 자기만의 인상을 남긴다.


샐러드가 양이 제법 되어서 요거트보울은 크기가 조금 작기를 바라긴 했지만. 크면 큰대로 좋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모두 나름의 존재의 이유가 있으리라. 색깔만 보아도 잘 영근 여름햇살이 떠오르는 과일조각들 한 가운데엔, 연보라색 꽃이 한 송이 놓여있다.



오토바이가 연신 지나가는 치앙마이의 길 위에서, 꽃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걷다보면 이 작은 도시 곳곳에 당연하게 피어있는 색색의 꽃들, 지난 한 주 동안 매일 같이 마주쳤던 그 생기 넘치는 모습들을 떠올려본다. 한 송이 꽃으로부터, 따뜻한 햇볕이 넘치도록 가득한 치앙마이의 온화한 기후와, 어디에서나 꽃들이 자라나도록 기꺼이 허용하는 치앙마이 사람들의 다정한 마음이 전해진다. 바나나나무가 저 하늘 끝에 닿도록 무럭무럭 자라나고, 아무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꽉 찬 바구니처럼 주렁주렁 열려있는 노란 과실들과 마주하게 되는 곳. 도로는 오토바이로 어지럽지만, 길가엔 어김없이 초록이 무성하고, 목걸이를 한 고양이들이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길마다마다 제 안방인 듯 쿨쿨 태평하게 낮잠을 자는 곳.


걸어가며 만난 치앙마이의 정겨운 풍경들이, 꽃 한 송이로 인하여 모두 접시에 담겼다. 단 한 송이지만, 이 꽃은 태양이 가득한 치앙마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모든 손님들을 기꺼이 환대하며 목에 걸어주는 꽃목걸이. 그리하여, 꽃을 놓은 순간에, 접시는 치앙마이로 완성되었다.


의미 없는 꽃은 접시에 담지 말라했지만, 그 꽃은 그곳에 놓여야만 하는 의미가 있다.


케이크는 딱 한 조각


늦은 아침을 먹은 후, 다시 걷는다. 어디에든 세워져있는 오토바이들은, 왜인지 마주칠 때마다 정겹다. 내가 지금 치앙마이를 걷고 있구나, 한낮의 햇살 아래 느긋이 쉬고 있는 오토바이들이 알려주기 때문일까.



디저트를 먹으러 간 비건카페 <Blue Diamond>. 갖가지 <Vegan>과 <Glutenfree> 디저트가 가득 채운 진열장을 보며 눈이 돌아간다. 초콜릿크림과 시트를 번갈아 샌드한 <비건 글루텐프리 초콜릿크림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하고, 야외 구석자리에 앉았다. 먹어보고 싶은 것들은 너무도 많지만, 그래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욕심내어 이것저것 시켜버리기 일쑤였지만, 내 위장이 허용하는 식후 케이크의 적정량은 딱 한 조각뿐이라는 걸, 이젠 아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마당 한 가운데선 금발머리 꼬마들이 마치 할머니집에 놀러오기라도 한 것처럼 신나게 뛰어 노는 중. 바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모두 싱그럽지만, 파란 하늘로 날아오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그 파동만큼이나, 선명하고 개구지게 생동의 감각들을 불러 일으킨다.


디저트란,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도, 순전히 기분을 위해서 또 먹는 것. 좋은 사람들과 실컷 수다를 떨며 한 입씩 더해주는 디저트도 좋지만, 혼자일 때엔, 좀 더 디저트 본연의 의미에 집중할 수 있다. 케이크 한 입에, 여름햇살 듬뿍 담고, 또 케이크 한 입에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 담고.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한 입, 또 한 입, 케이크도 사라져간다.


고양이가 있는 풍경


늦은 오후까지 빵을 구워내고 식히기에 바쁜 가게를 나와서, 다시 걷는다. 반짝이는 햇살 속엔 걷다가 마주치는 그 모든 것들이 덩달아 반짝여 보인다. 산책을 나온 누구네 집 고양이는 물론이고, 좋아하지 않는 콜라를 가득 실은 빨간 코카콜라 트럭까지도, 선물처럼 반짝반짝 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을 뒤덮은 무성한 나뭇잎, 무성한 전선들


잠깐 쉬어갈까 싶어 들어간 카페. 따뜻한 카모마일차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서 멍하니 곧 저물 오후를 떠나보내는데,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 떡하니 대문 앞에 자릴 잡는다. 옳거니, 네가 이 카페 주인이로구나! 네모난 창문 속이 마치 네모난 TV화면이라도 되는 듯, 고양이는 인형처럼 앉아서 한참동안 유리창 밖의 천태만상 인간사를 지켜보았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세상은 과연 어떨지 궁금해 하는 동안, 내 앞에 놓인 찻잔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저무는 태양 속에, 집으로 돌아간다. 길모퉁이를 도니 어제도 봤던 까만 고양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어슬렁어슬렁 저녁 마실을 나왔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해진 뒤에도, 어느 풍경 속에나 당연한 듯 자리한 고양이들.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듯, 고양이들은 느긋하게 사람이 닦아둔 길을 걸어 다닌다. 고양이가 그저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듯, 치앙마이사람들은 그저 천천히 함께 걸어갈 뿐이다. 왜 똥을 싸서 길을 더럽히고, 내 차를 긁고, 새끼를 마구 낳아서 생태계를 교란하냐며 화내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그저 자연이 우리에게 준 풍경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어슬렁어슬렁 동네고양이와 활짝 열린 여름의 문들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다가 불쑥 방향을 틀어 식당으로 향했다. 새콤한 맛을 기대하며 주문한 똠얌꿍은 코코넛밀크가 들어있어 맛도 색도 부드럽다. 기대와는 다르지만, 다른 그대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이 밤에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맛. 다 다른 맛이 들어있는 깜짝상자 속에 손을 넣어 ‘뽑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예전에 태국 남부의 섬들을 이곳저곳 여행할 때 어느 음식점에서 ‘이싼 –음식이 맛있는 것으로 유명한 태국 동북부지역- 스타일 똠얌꿍’을 주문했더니, 한국사람이라면 좀처럼 싫어할 수가 없는, 칼칼한 맑은 국물의 똠얌꿍이 나왔었는데. 한국도 지역별로 집집별로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이 가지각색이듯, 태국도 당연히 그럴 테지? ‘치앙마이 스타일 똠얌꿍’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태양이 뜨겁게 달구었던 거리, 무르익었던 따스함은 해진 뒤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풍경 속의 모든 것들에 온기를 준다. 불 꺼진 상점들 곁을 지나도, 인기척 없는 거리를 걷고 있어도, 삭막하거나 두렵지 않다. 고요한 이 시간이 지나면, 태양은 금세 다시 내일의 얼굴을 하고 떠올라, 이 모든 것들을 다시금 공평하게 비추어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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