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둘째 주
어제와 같은 메뉴를 오늘도 먹는 것
두 번째 숙소인 1인실 아파트는 작은 골목길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문을 열고 나오면 건물과 담벼락 사이의 좁은 틈에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두었는데, 바로 앞 골목길에서 아파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하는 용도라서 '정원'이나 '마당'이라고 부르기엔 머쓱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지난 숙소의 작은 정원도, 그 속에서 쪼르르 튀어나와 조그만 몸을 다리사이에 비비며 애정표현을 하던 고양이도, 정원 한가운데 오두막처럼 지어둔 공동부엌에서 호스트가족들과 나누던 작은 대화도, 벌써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해진, 새로운 일주일. 다만 지난 한 주 동안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온기만은 그대로 남아, 오늘도 그 눈부심을 한가득 안고서 오늘의 길을 나선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꽃을 수놓은 메뉴판이 ‘치앙마이에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CAFE HANNA> 어제와 다른 식당이지만, 어제와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완숙달걀을 올린 가든샐러드와 과일과 그래놀라를 얹은 요거트보울.
인생이라는 상자 속
스무 살 무렵의 난, 인생을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만약 인생이 작은 상자라면, 그 속에 하나씩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 가면 된다’고.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내게 정말 필요한 건 ‘싫은 것들을 상자에 넣지 않는 일’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낙관주의에, ‘함부로 누군가와 무언가를 쉽게 싫어하는 편협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내 스스로 정한 원칙까지 더해져, 나는 20대와 30대 내내 ‘지금 당장은 좋다 싫다 하기 애매한 것들’이나 심지어는 ‘지금은 좀 싫지만 나중엔 좋아질 가능성이 있는 것들’까지도 상자 안에 꾸역꾸역 넣어왔다. 그러다 문득 ‘이쯤 살았으면 내 상자도 어느 정도 채워졌겠지’ 싶어 속을 들여다보았는데, 정작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비워야겠다. 이 복잡한 상자 속에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그리하여, 나를 온전히 말해주는 것들을 진정으로 찾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나는 삶에 스스로 지켜나갈 작은 원칙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는 꼭 열을 가하지 않은 야채와 요거트를 먹는 것’도 그 작은 원칙들 중 하나다. ‘일단은 상자를 비우는 데 집중하자’고 마음먹고 나니, ‘편식한다’, ‘까다롭다’, ‘유난 떤다’ 등 이전엔 나를 곧잘 흔들어놓곤 하던 말들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어제와 같은 메뉴를 오늘 또 주문하는 것’을 혹자는 ‘나이가 들어서 점점 더 익숙한 것만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마흔을 넘기고 훌쩍 떠나간 낯선 나라에서 마주한 어제와 같은 음식들이 놓인 아침의 식탁은 내게 ‘네가 드디어 네 스스로 한 선택들에 대해서 지난날들보다 조금 더 단단한 확신을 얻게 되었구나’라는 조촐한 축하인사를 보내주었다.
익숙한 것들 속에도 어김없이
비록 어제와 같은 <요거트보울>이라도, 요거트 위에 얹는 과일은 오늘의 주방장의 마음대로. 어제와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도, 수수께끼의 선물상자를 여는 것 같은 마음으로 오늘의 접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앞에 놓인 오늘의 접시 속에서 파파야를 발견하곤 마냥 좋아진 기분에, 퍼뜩 깨달았다. ‘나 파파야 좋아하는구나!’
늙은 호박을 닮은 진한 주황색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육은, 서른 중반 즈음 떠났었던 이전 태국여행에서는 그다지 내 흥미를 끌지 못했었다. 그때의 난 파파야는 내 취향이 되기엔 너무 ‘무던하다’고 생각했었다. 또 퍼뜩 깨닫는다. 바뀌지 않을 것 같던 내 입맛도 많이 바뀌었구나. 문득 십년 전을 돌아보니, 그곳엔 지금과는 완전 다른 삶을 살았던 내가 있다.
변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것들로 상자 속을 채워 넣는 것. 나이가 들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점차 확신이 생기고, 그래서 점점 더 익숙한 것들을 찾게 되어도, 새롭게 상자에 담고 싶은 것들은 계속 새로이 생겨난다. 인생이란, 완전히 숨을 거두기 직전까진, 계속 상자를 비워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미슐랭 옆집들
발길 닿는 대로 걷다보니 ‘치앙마이’의 창시자 격인 세 명의 왕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조각상 ‘삼왕상’ 앞이다. 내 관심은 삼왕상을 가볍게 스치곤 맞은 편 거리에 즐비한 식당들로 향했다. 파란색으로 칠한 벽이 눈에 띄는 ‘Lim Lao’ 어묵국수집은 ‘미슐랭가이드’에서 ‘빕그루망Bib Gourmand –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맛을 갖춘 식당에 주는 등급’을 받은 식당이라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꼭 한 번 가봐야지 하고 지도에 표시해두었었다.
그런데 이런, 간발의 차로 영업이 끝나버렸다. 이 집의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 동안 –이 글을 쓰며 확인해보니 방문 후인 2023년과 2024년에도 빕구르망 등급을 유지해서, 총 7년 동안 미슐랭 맛집에 올라가있다- 매년 꼬박꼬박 미슐랭에서 빕그루망 등급을 받은 비결은 아마도, 하루 다섯 시간 남짓의 영업시간이 아닐까. 오전 장사만 하면서 딱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양만을 판매하고, 오후 일찍 문을 닫은 뒤엔 충분히 쉬면서 다음날을 준비하고. 이 집은 국수에 들어가는 어묵을 바다생선으로 직접 만드는데, -한국사람이면 싫어할 수 없는!- ‘쫄깃쫄깃함’이 특장점이란다. 내일은 꼭 시간 맞춰 와야겠다, 결심하곤 발걸음을 옮긴다.
근데 이제 조림을 곁들인,
‘미슐랭 맛집’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걸음은 그 옆집에서 곧바로 멈추어버렸다. 가게 앞에 주렁주렁 걸어둔 간장양념에 푹 졸인 오리고기가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오리고기를 간장에 푹 졸이면 맛있거덩요! 근데 이제 집에서 혼자 해먹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덩요!’ 메뉴판을 대강 훑어보니 오리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다양한 종류의 덮밥과 쌀국수를 팔고 있다. 덮밥 하나를 포장 주문했더니, 곧바로 두툼한 오리고기 조각 하나를 썰어 익힌 청경채와 함께 담아준다. 포장용기의 뚜껑을 닫기 전, 큰 국자로 양념을 떠서 마지막으로 한 번 고기 위에 차르르-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 이미 아는 그 맛. 윤기가 흐르는 양념의 때깔만 보아도, 벌써 음식을 다 먹은 것 같다.
포장한 덮밥을 들고서, 이번엔 ‘미슐랭 옆옆집’을 자연스레 기웃거린다. 간단한 식사와 간식거리를 파는 테이크아웃 전문점. 매장도 깨끗하고 음식들의 담음새도 정갈하다. 큼직한 새우가 든 스프링롤부터 일단 하나 집어 들고 고심하다가, ‘서양부추’라고 불리는 Chive를 넣고 찐 만두-Dumpling-을 하나 더 골랐다. 식사엔 후식이 빠질 수 없으니, 녹두와 Salty Egg가 든 작은 중국식 만주 한 상자도 집는다. 아침은 늘 먹는 대로 먹었지만, 저녁은 마음이 끌리는 대로. 풍성하게 차려질 저녁식탁에 먹지 않아도 벌써 기분 좋은 포만감이 마음을 한껏 채운다.
오늘은 그냥 지나치는 날
모퉁이를 도니 바나나튀김 노점이 영업 중이다. 이 집은 구글지도 평점이 꽤 높은데, 영업시간이 일정하지가 않다. 어제는 이 길에 빈 천막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이곳이 지도의 그 유명한 튀김집인 줄도 모르는 채로 지나쳤던 것 같은데. 다음에 언제 또 노점이 문을 열지 모르니 지금 당장 한 봉지 사서 맛을 봐야하나. 누가 지운 건지 모를 의무감에 잠시 갈등하다가, 두 손에 잔뜩 들린 음식보따리들을 깨닫고 오늘은 단념하기로 한다. 튀김은 사서 곧바로 먹어야하는데, 오늘은 짐이 너무 많아 그럴 여유가 없다. 치앙마이에 앞으로 세 달이나 머물 텐데, 한 번쯤은 더 문을 연 튀김집과 마주치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짧은 여행이 아니어서 부릴 수 있는 여유. 미슐랭 맛집도, 랜덤뽑기처럼 문을 여는 튀김집도,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바나나나무 무성한
누군가의 손에서 태어난 호랑이는 담벼락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 누군가의 집 앞에 널어둔 빨래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햇살에 뽀송뽀송하게 마른다. 하늘 높이 자라난 바나나나무엔, 푸릇푸릇한 바나나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양손 가득 저녁거리를 들고, 뜨거운 햇살 속에 거인 같은 바나나나무가 굽어보는 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으니, ‘치앙마이구나’ 싶다.
아는 맛들의 기쁨
집에 돌아오자마자 차를 끓여 식탁을 차렸다. 오늘 차에 곁들일 간식은 <미슐랭 옆옆집>의 녹두와 짠달걀Salty Egg로 만든 앙금이 든 중국식 만주. 홀짝홀짝 차를 마시며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칸초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만주 여섯 개가 순식간에 전부 사라졌다. 흔히 아는 만주보다 단맛이 적고, 달걀노른자의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있어서인지, 식탁을 차릴 때는 분명 우아한 티타임을 가질 생각이었는데 식욕에 시동이 제대로 걸러버렸다. 저녁으로 먹으려고 남겨뒀던 부추만두를 뜯는다. 간장과 식초로 만든 소스까지 곁들이니, 한국에서 먹던 만두랑 별 다르지 않다. 이거 맛있는데? 그대로 오리고기 덮밥까지 뜯을 뻔하다가, 아직 저녁을 먹기엔 너무 이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와 동네를 한 바퀴 산책했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어제 저녁거리를 샀던 시장으로 향한다. 한 입 크기로 썰어 담은 파파야를 한 봉지 사서 달랑달랑 손에 들고 돌아온다. 느릿느릿 흘러간 하루가, 어느새 캄캄한 밤의 커튼을 뒤집어썼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새 식탁을 차린다. 간장소스에 졸인 오리고기 덮밥과 새우 스프링롤. 푹 졸인 오리고기는 부드럽고, 스프링롤을 가득 채운 야채는 억센 맛이 없이 부드러우면서 아삭아삭 신선하다. ‘오리고기와 함께 담아준 청경채의 익힘 정도도 딱 좋군요!’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딱 기대했던 그 맛들. 정확히 아는 맛을 내준 요리사들에게 고맙다.
단골집은 미슐랭 옆집으로 할게요
포장해온 음식들을 전부 깨끗이 비우고 난 후,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이 숙소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은, ‘미슐랭 옆집들’이 단골집이 될 것 같다고.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한국에서 미리 세웠던 계획은, 매일 근처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반찬거리를 사서 저녁 한 상을 차리는 것이었는데, 하루만에 그 계획이 변경됐다. 인터넷만 켜면 벌써 현지에 와있는 것처럼 온갖 사진과 영상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세상이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실전은 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오리고기 집에서 덮밥 말고 국수도 먹어보고 싶고, 테이크아웃 상점에서 다른 식사거리들과 디저트도 골고루 사다 맛보고 싶은데. 아침엔 ‘익히지 않은 야채와 요거트’의 루틴도 지켜야 하고. 구글지도에 미리 표시해둔 수십 개의 맛집들은 다 언제 가지?
떠나오기 전엔 일주일이면 올드타운 남쪽을 실컷 탐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서, 나도 느리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일주일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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