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혹은 훗날, 늘 떠나기를 꿈꾸는 사람으로부터
내 나라의 이방인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해외에서 학업을 하고, 노동자로도 살아보며, 타국살이의 어려움을 수없이 맞닥뜨렸지만, 그때마다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내 나라의 이방인’인 것보다는 차라리 낯선 나라의 이방인인 것이 낫다고.
태어난 나라를 떠나는 이유
일본은 요즘 젊은이들이 나라를 떠나는 ‘탈국가현상’이 한창이란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처음 명명했던 ‘프리타’ -고정적인 일자리 없이 단기나 장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가 우리나라에도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났다는데. ‘프리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땐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열심히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거나, ‘젊은 사람들이 점점 개인주의적이 되어간다’는 등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분석들이 제법 우세했던 것 같은데, ‘한창 일해야 할 사람들’이 ‘프리타’가 되어가는 주된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청년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에 있다는 사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탈국가현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태어난 나라가 ‘태어나버린 나라’가 되었을 때
올해 우리나라는 ‘일하지 않고 쉰’ 청년인구가 역대 최대란다. 양질의 일자리는 터무니없이 적고, 가뭄에 콩 나듯 나는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은 지나치게 과열되어, 업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는 과정보다는 오로지 ‘떨어트리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피 튀기는 경쟁 속에 조금이라도 더 자격을 갖추기 위해 ‘취업공부’를 했거나, 몇 번을 도전했지만 취업이 성사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쉬었거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청년들이 ‘일하지 않고 쉰’ 이유는 가지각색일 테지만,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는 ‘왜 고정적인 일자리 얻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듯하다. ‘프리타’를 비롯해 일본을 휩쓴 각종 사회현상들이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엔 어김없이 한국에도 상륙해온 그간의 패턴을 보면, ‘젊은 청년들의 탈국가현상’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예정된 수순인 것 같다.
그런데, ‘탈국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게 20대와 30대 청년들뿐일까?
일단 가서 살아나 보자
마흔이 됐다. 이제부터는 정말 노후준비를 시작해야한다고 다들 걱정하는 나이. 당장 다음 달 수입이 얼마나 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그러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작은 자유 정도는 있는 프리랜서, 혹은 ‘프리타’의 삶. 다른 나라에서 자리를 잡기엔 이미 늦었다고들 말하는 나이지만, 한국에 이미 태어나버린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나이가 들면 그때는 내가 직접 ‘살고 싶은 나라’를 선택해 여생을 보내고 싶다.
그래서, 2022년 봄, ‘늙어서 살고 싶은 곳’으로 매년 ‘미리 여행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여건이 되는 대로, 어느 해는 겨울에, 어느 해는 여름에, 또 어느 해는 봄에. 그렇게 살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늙어서 내 마음 뉘일 곳이 어디인지를.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물었다. ‘완전 F네. T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계획이야! 비자는? 영주권은? 자금은? 살고 싶다고 다 가서 살 수 있어?’ 다시 내가 답했다. ‘현실적인 여건들은 살아보면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그러다 확신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차근차근 실현되도록 만들어야지.’
한 계절은 살아봐야지
고작 ‘한 달’ 가지고 늙어서 살 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겠어? 적어도 ‘한 계절’은 살아봐야지. 그렇게 뚝딱 첫 여행의 기간이 정해졌다. 석 달, 12주. 한국에서 내가 가장 피하고픈 계절인, 살을 에는 겨울이 첫 여행의 계절이 되었다. ‘추운 겨울은 무조건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고 싶다’는 염원을 따라, 태양이 작열하는 남쪽나라, 태국이 제일 먼저 후보에 올랐다. 굳이 ‘늙어서’를 가정해보지 않아도 대도시의 번잡함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터라, 규모가 있는 도시들은 피하기로 했다. 곧바로 머릿속에 선명히 목적지가 떠올랐다. 태국 북부의 산간지역, 떠오르는 ‘예술가들의 집결지’이자 ‘디지털노마드들의 성지’라 불리는 ‘치앙마이’. 결정을 끝내고 얼마 있지 않아 한 항공사가 ‘겨울특가’ 행사를 시작했고, 운 좋게도 생각했던 예산의 절반 정도 되는 가격에 왕복항공권을 구입했다.
치앙마이 세 달 살기
그렇게 치앙마이에서 2022년 12월 중순부터 2023년 3월 중순까지, 세 달 간의 살아보기가 시작됐다. 처음엔 단순히 한 달마다 지역을 옮겨가며 살아보기를 계획했다가, 중간에 열흘 동안 ‘빠이’에 다녀오기로 결정하면서 숙박지역은 총 다섯 개로 나뉘었다.
하이야, 올드타운, 빠이, 창푸악, 창클란 - 고루고루 살아 보기
해자와 무너진 벽의 흔적들이 정사각형으로 감싸고 있는 ‘올드타운’을 중심으로, 첫 주는 해자 남쪽에 위치한 조용한 주거지역 ‘하이야Hai-Ya’의 민박집에서 ‘여행자처럼’ 일주일을 보냈다. 2022년 마지막 날과 2023년 첫 번째 날이 끼어있는 두 번째 주는 작은 부엌이 딸린 ‘올드타운’의 1인실 아파트에서 ‘절반은 여행자, 절반은 현지인’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세 번째 주엔 치앙마이에서 약 3시간 거리인 작은 시골마을 ‘빠이’로 가서 열흘간 그곳의 전원생활에 충실했다.
본격적인 ‘현지생활’이 시작된 건 빠이에서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온 후부터. 올드타운 북쪽에 위치한 ‘창푸악게이트’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타닌시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열흘을 보낸 뒤, 같은 ‘창푸악’ 지역 내에서 ‘마야몰’과 ‘원님만’ 등 쇼핑몰들이 밀집해있는 올드타운 북서쪽으로 이동해 대규모콘도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마지막 3주 가량을 머문 숙소는 올드타운 동남쪽 ‘창클란’ 지역에 위치한 수영장이 딸린 콘도였다.
첫 일주일
첫 일주일을 보낸 하이야의 숙소는 정원에 공동부엌이 있고, 단층주택 두 채와 이층주택 한 채가 ㄷ자 형태로 정원을 둘러싸고 지어져있었는데, 각 객실에서 문을 열면 곧바로 신발을 신고 정원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여서 아침저녁으로 정원에서 간간이 마주치는 호스트가족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소셜라이징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충분한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었다. 관광객들이 많은 올드타운이나, 현지인들이 북적이는 창클란, 창푸악, 나머 등과 달리 매우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있어서, 한국의 바쁜 일상에서 갓 빠져나온 첫 일주일 동안 천천히 삶의 속도를 늦추기에도 좋았다.
휴가의 완성은 고양이
휴일도 따로 없이 남들 다 노는 날에도 홀로 일하기 일쑤인 ‘한국의 프리랜서 겸 프로과로러’ 생활에서 떠나 생전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새로운 세 달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 하던 일은 모두 접고 느릿느릿 ‘휴가처럼’ 보내기로 했던 첫 일주일. 모처럼의 휴가를 ‘휴가처럼’ 완성시켜준 건, 낮에도 밤에도, 마주치면 쪼르르 달려와 내 다리 사이를 오가며 안부를 묻던 숙소의 어린 고양이였다.
이른 아침 버릇처럼 서둘러 숙소를 나서다가도, 집사가 널어둔 빨래 밑에서 청산에 살어리랏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면, 아차, 오늘 내겐 서두를 이유가 없었지, 깨닫고는 따스한 아침햇살 속에서 내게 뽈뽈뽈 다가와 부지런히 애정표현을 하는 작은 털뭉치의 몸짓에 사르르 녹아내리곤 했던 첫 일주일.
느릿느릿 흘러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느덧 첫 번째 숙소를 떠나는 날이자,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하는 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 하이야Hai-Ya에서 보낸 ‘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첫 주의 기록이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첫 권> 브런치북으로 발행되어있습니다. ‘작품’을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어요.
* 지금 보시는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2권>에서는 ‘치앙마이 세 달 살이’ 중 ‘올드타운’에서 보낸 두 번째 일주일의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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