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 달 살아보기, 올드타운에서의 둘째 주
떠나는 날
올드타운에서 맞는 마지막 아침, 지난 한 주 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로 산책을 나섰다. 작은 호스텔들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있으니 새삼 오늘이 떠나는 날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연이어 마주치는 풍경들이 어제까지 걸었던 길들과는 사뭇 달라서, 몇 시간 뒤면 아직도 새로운 것이 가득한 이 도시를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워졌다. 열흘 후엔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올 테지만, 그래도 떠나는 기분은 늘 싱숭생숭하다.
일찍 문을 여는 비건베이커리카페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널찍한 공용테이블엔 멋진 금발머리언니가 커피 한 잔에 케이크 하나를 시켜두고 노트북 앞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같은 취미를 가진 동아리회원들끼리 아무 때나 와서 과제도 하고,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차도 마시는 ‘동아리카페’에 온 것 같은 느낌. ‘요거트뮤즐리보울’을 주문했더니, 처음으로 꽃을 놓지 않은 접시가 나왔다.
모양내어 깎은 것이 아닌 투박하게 툭- 툭- 잘라 넣은 과일조각들과, 한 차례 더 볶아 내거나 하지 않고 봉지를 뜯어 바로 그릇에 부은 듯한 뮤즐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늦게까지 함께 떠들다가 잠든 뒤 다음날 아침 친구가 파자마차림으로 부엌에서 후다닥 가져온 것 같은 모양새. 당도가 낮고 살짝 버석버석한 식감의 구아바와 귀리를 쪄서 그대로 압착한 담백한 뮤즐리의 궁합이 제법 좋다. 수분이 많은 수박과 달콤한 바나나는 딱 두어 조각씩만을 넣어서,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니 딱 ‘청빈한’ 아침식사를 한 느낌.
첫 끼니는 청렴하게 먹었으니, 다음은 탄수화물을 빵빵하게 채워줄 차례! 오늘은 오후 내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느라 카페에서 차와 디저트를 즐길 여유가 없으니, 아침에 미리 서둘러 식사와 디저트를 전부 해치우기로 했다.
라즈베리가 든 비건 글루텐프리 브라우니 한 조각을 주문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론, 비건 레시피로 만든 브라우니는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어딜 가도 그 맛이 비등비등한 편이다. 오늘의 브라우니도, 딱 예상했던 그 맛. 하지만 모르는 맛보다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입안에 한 술 떠 넣자마자 와 닿은 ‘익숙한 그 맛’에 흡족해져 금세 작은 디저트 한 조각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치앙마이에선 고양이가 손님을 배웅해요!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현관에 세워둔 여행가방 두 개가 나를 맞이한다. 이젠 정말 떠나야할 시간. 첫 날처럼 다시 말끔히 비워진 숙소를 마지막으로 한 바퀴 둘러본 뒤, 식탁 위에 열쇠를 올려두고 지난 일주일간 정든 아파트를 나왔다. 돌돌돌돌 양손으로 여행가방을 끌며 골목길 끝으로 나와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데, 저녁 귀갓길에 마주치곤 했던 빨간 목걸이를 한 얼룩고양이가 오늘은 웬일로 아침부터 나와 어슬렁거린다. 마치, 오늘이 내가 떠나는 날이라는 걸 알고 배웅이라도 나온 듯.
택시가 올드타운을 빙 둘러 오는 탓에 5분 정도를 기다려야했지만,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배를 드러내고 뒹굴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고양이 덕분에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 해가 넘어갈 즈음이면 바로 이 자리에서 마주쳤던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알고서 마중을 나온 건지. 어젯밤까지는 마주쳐도 데면데면 쳐다보곤 제 갈 길 가기 바빴으면서, 떠나야하는 오늘은 왜 갑자기 다가와 이리도 다정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건지. 발라당 드러누워 같이 놀자는 듯 날 향해 작은 솜방망이를 연신 뻗어대다가, 고양이는 따스한 한낮의 햇살에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이러면 떠날 수가 없잖아!’하는 걱정도 잠시, 택시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고양이는 어디서 알람이라도 울린 듯 발딱 일어나 귀를 쫑긋 세우더니 곧 홀연히 떠나버렸다. 내게는 들리지 않는, 저 멀리에서 택시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얼룩고양이가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택시가 골목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들의 능력
어쩌면 고양이들에겐 당연한 일이리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영역에 어느 날 불쑥 도착하고, 또 떠나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 그것은 고양이들에겐 ‘생존’과 직결되는 본능적인 활동이다. 인간들이 알려준 적도 없는 인간사를 마치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하는 고양이들을 옛사람들은 ‘영물’이라 칭하기도 했지만. 고양이들이 때때로 ‘영물처럼’ 인간 앞에 훌쩍 나타나고 또 사라지는 건, 인간이 길 위의 작은 생명들을 없는 듯 무심히 지나치며 살아갈 때에도, 고양이들은 항상 인간의 곁에서, 매순간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틈바구니에서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편의점에서 멀미약을 사 먹었다. 일찌감치 버스표를 예매한 덕분에 멀미가 가장 덜 하다는 운전석 뒷좌석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지만, 빠이로 가는 길이 워낙에 구불구불 험난하다기에 롤러코스터도 멀미가 나서 타지 못하는 난 혹여 비상사태라도 벌어질까봐 미리 비닐봉투를 배낭 앞주머니에 바리바리 넣어두고서 잔뜩 긴장한 채로 승합차에 올랐다.
구불구불 산길 따라
편평한 지붕 위에 승객들의 여행가방을 차곡차곡 싣고서, 승합차는 빠이를 향해 떠났다. 도로 위를 성큼성큼 달려 나가며 보는 치앙마이의 풍경은 작은 골목들을 타박타박 거닐며 보는 것과는 전혀 달라 가슴에 첨벙첨벙 낯선 물결을 일으켰다. 한국을 떠나는 것과는 또 다른, 떠나는 뭉클함에 설렜던 것도 잠시. 승합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외곽에 접어들었고, 곧 감기약이 온몸에 나른하게 잠을 불러왔다.
놀이공원의 범퍼카라도 탄 것처럼 몸이 연신 앞뒤로 흔들려 잠에서 퍼뜩 깨어났더니, 승합차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10초마다 한 번씩 방향을 바꾸며 지그재그 달려 나가는 중.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차가 흔들려서 ‘어떻게 버티지’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는데, 핸드폰 시계를 보니 다행히 빠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시간이 약 1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멀미약의 위력이 대단하긴 하구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릴 정도로 험한 길을 달려오는데도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니! 5분 정도 승합차 천장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버텼더니 제법 잘 닦인 도로가 나타났고, 얼마 안 가 빠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치앙마이에서 고양이친구의 배웅을 받았다고요?
‘빠이에서는 개들이 마중을 해요. 근데 너무 늦게 오셨어요. 기다리다가 그만 햇살이 좋아서 쿨쿨 잠들어버렸지 뭐예요.’
길고도 짧은 여정을 마치고 빠이 버스터미널에 내린 나를 반긴 건,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이 데워둔 대기석 구석에서 한가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까만 복슬개였다. 이 녀석, 성격이 참도 무던한가 보다. 승합차들이 연신 도착해 사람을 쏟아내고, 또 싣고 떠나는 복닥거리는 버스터미널 플랫폼에 떡하니 자릴 잡고 누운 걸 보면. 마주치면 사납게 짖어댔던 치앙마이의 개들과 달리, 스르르 잠에서 깨어난 복슬개는 두 눈을 몇 번 꿈뻑이곤 인생 다 살아본 신선처럼 다시 태평하게 잠을 청했다.
설렁설렁 여행가방을 끌며 버스터미널 밖으로 나왔더니, 주변 숙소에서 손님들을 태우러온 승합차들이 저 멀리까지 줄을 섰다. 한 대, 또 한 대, 떠나는 차들을 지켜보며 느긋하게 내가 예약한 숙소의 셔틀버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이런, 어찌된 일인지 마지막 차가 떠나고 나만 홀로 터미널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빠이에 도착하자마자 비상사태다. 오는 내내 멀미약에 취해 쿨쿨 자느라 점심식사도 하지 못해서 배도 고픈데! 부랴부랴 숙박앱을 켜서 숙소에 메시지를 보내는데, 택시기사들이 연신 다가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태국에선 항상 택시앱을 이용해온지라 길에서 무턱대고 택시를 타는 건 아직 낯설어 일단 거절을 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서 ‘지금 바로 픽업하러 가겠다’는 답변이 날아왔다.
휴우. 그제야 여유가 생겨 터미널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에 즐비한 상점들에 내걸린 ‘휴양지 옷들’을 보니 ‘여긴 치앙마이와는 또 다른 세상’임이 생생하게 체감된다. 곧이어 내 앞에 도착한 건, 승합차가 아니라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연결한 ‘삼륜구동 오픈카’였다. 손님용 승합차가 지금 다른 곳에 손님들을 태우러 가있어 부득이하게 직원용 탈것을 끌고 나왔다며 직원은 연신 양해를 구했지만, 이런 흔치 않은 경험, 오히려 좋아!
후딱 짐을 싣고 리어카에 올라탔다. 빠이는 치앙마이보다 훨씬 기온이 낮다고 들었는데,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오픈카에 앉아있으려니 과연,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복잡한 메인스트릿을 금세 벗어나, 병원이 있는 큰 도로를 얼마간 달리고, 방향을 꺾어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빠이에 왔구나. 평온하게 펼쳐진 너른 논밭에 이유도 알 수 없이 뭉클한 것도 찰나, 숙소에 도착했더니 이번에도 까만 개가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빠이의 마중전문요원!
이 녀석, 아무리 봐도 아까 버스터미널에서 한갓지게 낮잠을 자던 그 복슬개랑 똑같이 생겼는데. 혹시 빠이에 ‘손님마중’을 전문으로 하는 ‘독인블랙-Dog In Black’ 요원들이라도 있는 건지. 덩치가 나만큼 큰 까만 개는 요란하게 짖거나 달려들지 않고 듬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두 눈을 꿈뻑이며 새로 온 손님을 맞아주었다.
떠날 때에는 고양이가, 도착할 때에는 강아지가, 각각 배웅과 마중을 맡아주었던 하루.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 앞으로 일주일간 내가 묵을 방갈로-테라스가 딸린 단층 목조가옥-에 가보니, 이번엔 시원하게 탁 트인 논과 그 너머에 우뚝 선 산들이 환영인사를 한다. 논이라면 어릴 때 시골집에서 지겹도록 보고 자랐는데. 딱히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닌데. 내 앞에 펼쳐진 너른 땅을 바라보며 숨을 한 번 한껏 들이쉬니, 호흡을 따라 천천히, 마음에 무언가 차오른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구름 위를 날아 도착한 낯선 나라. 그곳에서 다시 몇 시간 동안 구불구불 험난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또 다른 낯선 도시. 낯설고 낯선 풍경들을 돌고 돌아 결국에 닿은 곳은, 내 가장 오래된 유년의 기억들과 서로 맞닿아있었다.
*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2권 -올드타운에서의 일주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다음 주부터는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3권 -빠이의 열흘>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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