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의 한가운데 불꽃은 고요히 타오르고
겸허해지기 위한 화려함
늦은 저녁, 도이수텝Doi Suthep으로 향했다. 치앙마이 시내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산 정상에 지어진 황금의 사원. 금으로 온통 치장하여 화려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래서 혼자서는 걸음할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았었다. 종일이 걸릴 것을 각오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빌려서 해발 1,600미터라는 산을 수양하듯 한 번 올라가 볼까 하는 투지가 솟아오르기도 했지만, 실행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엔 손님들을 맞고야 말았다.
택시비가 저렴한 치앙마이에선, 특히나 어르신들을 모셨다면, 가까운 거리든 먼 거리든 무조건 택시를 타는 것이 간편하지만, 바로 그 어르신들에게 ‘썽태우’ 한 번 태워 드릴까 하여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치앙마이동물원 앞에서 내렸다.
썽태우는 작은 트럭의 짐칸에 두 줄로 마주 보는 좌석을 깔아서 승객들을 여럿 태울 수 있도록 개조한 승합차인데, 정해진 정류장이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썽태우를 불러 세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요금을 흥정한 뒤 탑승을 한다. -일종의 마을버스랄까?- 태국의 정취를 듬뿍 실은 낭만적인 교통수단이지만, 아무래도 외국인 여행자 입장에선 정확한 의사소통이 어렵고, 무엇보다 치앙마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걷기 좋은’ 도시였던지라 혼자 머무는 지난 세 달 동안은 좀처럼 썽태우를 탈 기회가 없었다.
더운 나라의 교통수단답게 썽태우는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후면이 오픈되어 있는데 –혹은 승객이 타는 짐칸 부분에 지붕만 덮은 형태인 것들도 있다- 도심에선 매연이 곧장 들이닥치는 그 개방성이 단점이기도 하지만, 도이수텝은 도시 외곽의 산 정상에 있으니 썽태우를 타면 산바람도 쐬고 경치구경도 하기 좋지 않을까 싶었다.
치앙마이동물원 앞 길가에 드문드문 서 있는 썽태우들은 대부분 도이수텝으로 간다. 출발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승객이 대여섯 명 정도 모이면 알아서 운행을 시작하는 식이다. 가까이에 세워져 있는 썽태우로 가서 기사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니 대뜸 A4용지에 출력한 요금표를 보여 주는데, 인터넷에서 미리 알아본 것보다 1인당 가격이 10-20바트 정도 비싸다. 날은 덥고,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으니 깎아 달라 실랑이 벌이지 않고 썽태우에 올랐다.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먼저 탑승해 있어 간단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기들은 시내 아무 데서 지나가는 썽태우를 붙들고 도이수텝 가는 가격을 흥정해 타고 온 길이란다. 시내에서 도이수텝까지 가는 가격은 얼마냐고 물으니 ‘기사아저씨한테 물어 보세요’하곤 절대 함구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요금표에 적힌 가격보다는 저렴하게 합의를 보았나 보다. 곧 외국인 관광객 둘이 헐레벌떡 달려와 여정에 합류했고, 동물원 앞 나무그늘에서 늘어지게 쉬던 썽태우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이수텝을 향해 출발했다.
자그마한 기념품과 먹거리를 파는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원 앞은 한국의 여느 유명 사찰 앞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치앙마이에 온 뒤 처음으로 사원에 입장하기 위해 표를 샀다. 자그마한 트램에 몸을 싣고 가파른 트랙을 달려 이윽고 정상에 다다르니, 마치 다른 세상의 문을 연 것처럼 사방이 온통 번쩍이는 금칠이다.
시선에 부딪쳐 오는 그 모든 것들이 금. 단정한 황금의 지붕 아래, 수려하게 조각한 황금의 부처가 걸치고 있는 얇은 옷자락마저, 한 올 한 올이 교교한 금싸라기다. 감탄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사원을 치장한 금이 아니라, 가장 값비싼 재료를 기꺼이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이 사원을 구석구석까지 더없이 정교하게 완성해 낸 사람들의 집념 때문에 기탄없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왜.
단지 ‘믿음’을 위하여 이리도 많은 재화와 고통에 가까운 헌신을 기꺼이 쏟아붓는 것인지.
욕망의 덧없음을 설파하는 종교 역시도, 결국엔 인간의 욕망. 번뇌는 그만 여기에 내려놓으라 말하는 금의 제단 또한, 고혈로 지어졌을진대. 사진으로만 볼 때는 그 사치가 모순이라 여기기도 했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고 나니, 고행 없인 얻어질 수 없는 화려함 앞에 한없이 겸허해진다.
이 많은 금들을 이 높은 산의 정상까지 이고 지고 올라온 이들은. 수많은 날을 들여 끈질기게 조각하고 완성해 낸 이들은. 마침내 마주한 극치의 제단 앞에 가장 먼저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이 많은 금들이 향하는 끝엔
금빛의 한가운데 불꽃은 고요히 타오르고, 그 아지랑이 너머엔 오늘도 저 산 아래 시끌벅적 돌아가는 인간사를 관망하듯 와불이 지그시 팔을 베고 있다.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사의 행불행들을, 그 누구도 피해 갈 수는 없다. 허나, 가장 사치스러운 짐들을 어깨에 지고 외딴 산의 정상에 올라, 생의 희로애락을 불러오는 그 모든 욕망들을 모두 꺼내어 펼쳐 놓고, 어쩌면 덧없을지도 모르는 화려함을 뼈를 깎아내는 의지로 끝까지 조각해 냈을 때, 그들의 가슴속에 끊임없이 출렁이던 속세의 파도들은 비로소 저 멀리 떠내려 가 잠잠한 수평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금들이 향하는 곳엔, 연약한 심지 끝에 타오르는 자그마한 불꽃. 옅은 바람에도 그 꽃은 곧 꺼질 듯 위태로이 흔들리지만. 그렇기에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그 열망과 번뇌는, 황금으로 지어진 단단한 요람의 한가운데서 매일 같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피어난다. 마치, 이 세상을 전부 고귀한 황금으로 빈틈없이 완벽하게 칠한다 하여도, 생명이란 그 속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 말하듯.
허나 그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불꽃은 끝내는 온갖 물질들로 치장한 속세의 속박을 벗어나, 보이지 않는 바람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자유자재로 일렁이리라.
어느덧 무르익은 밤 속에 나무는 그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들을 더욱 또렷이 새기고, 사원의 지붕은 더욱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그 뾰족한 끝을 뻗었다. 인간이 제아무리 높디높은 마천루를 지어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의 꼭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늘 하늘을 향한다.
고층빌딩들은 거침없이 똑바로 저 하늘을 찌르고자 하지만.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닮은 태국사원들의 지붕 끝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쏟아부은 끝에 결국 마주하게 될 비워냄이, 어슴푸레 가슴 한 구석에 와닿는 것도 같다.
치앙마이의 세달살이가 마침내 모두 끝나가던 어느 하루, 처음으로 먼 산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백 년의 씨앗들
도이수텝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해자를 걷다가 연꽃들을 보았다. 며칠 전 해자의 다른 쪽 모퉁이를 홀로 걷다가 조촐하게 피어난 연꽃 몇 송이를 보았었는데, 이번엔 여럿이 함께 산책을 나선 것을 알고 환대라도 하듯, 꽃들이 여러 송이 꽃다발처럼 피었다.
색색의 선명한 빛깔들이 왜인지 믿기지 않아, 한참 동안 연꽃들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뿌리에서 올라온 줄기들인데도 그 끝에 피어난 꽃들의 색깔은 제각각이다. 연의 씨앗은 백 년도 거뜬히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 싹을 틔워 낸다고 하는데, 수면 위로 쭉 줄기를 내밀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보낸 나날들보다도 훨씬 더 길고도 긴 날들을 탁한 물밑에서 그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발아의 순간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던 씨앗은, 언제 자신이 피워 낼 꽃의 색깔을 알게 되었을까.
인고의 시간 끝에 저 너른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젖힌 꽃잎들이 바로 옆에 피어난 꽃과는 사뭇 다른 색깔이었을 때, 그 꽃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온몸에 새겨낸 그 빛깔이, 틀리지 않았다고.
빛나는 태양의 품에서 보낸 세 달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그만 치앙마이를 떠나야 하는데, 내가 거리의 풍경을 하나둘 접어 기억 속에 고이 묻기 시작한 지금이 연꽃에게는 수없이 많은 날들 동안 진흙 속에 숨죽여 묻어 두었던 자기만의 색들을 마침내 모두 꺼내어 펼칠 때인가 보다.
물과 공기와 바람의 온도, 해가 뜨는 시각과 하루 중 햇살이 비추는 시간, 그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연꽃은 그 아무런 의심 없이 피어난다.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든, 더는 주저하지 않고. 그 순간이 되면 꽃은, 너는 어떤 색깔을 띠어야 한다고 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 아무런 계산 없이 절로 자기 안에 머금고 있던 빛깔을 뽐낸다.
자연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인간 역시도 분명 그 일부일진대, 이 너른 생명의 터를 모조리 다 독점하고 그리도 복잡한 문명을 일구어 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깨치지 못한 것 같다. 우리 각각은 그 언제 피어나는 꽃인지, 그때가 되면, 바로 옆에 피어난 꽃이 어떤 빛깔이든, 나는 그 어떤 나만의 빛깔을 띠어야 하는지.
연꽃이 소리 없이 뿌리내린 물가엔, 사원이 터를 잡았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가장 귀한 금으로 화려한 제단을 세워 두었던 어제의 사원과 달리, 오늘의 사원은 그 아무나 오가는 길에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밤에, 또 낮에, 잠깐 틈을 내어 사원 구석구석에 두 손 모아 고이 내려 두고 간 소박한 바람과 자질구레한 번뇌들이 한낮의 다정한 어루만짐을 받아 꽃과 들풀과 나무들 사이사이에 알록달록 저마다의 색으로 피었다.
저 들에 우연히 피어난 풀도 꽃도 나무도, 모두 한 치의 의심 없이 제 색을 아는데. 인간만은 스스로 띠어야 하는 빛깔을 알 수 없었기에, 이 광대한 역사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같은 믿음에 기대어 함께 손을 모아 지어 낸 사원이 진흙탕 속에서 스스로 피어난 연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빛깔들의 향연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제 아무리 웅장한 역사를 써낸다 한들, 홀로는 그 어떤 꽃도 절로 피워낼 수 없음을, 일찍이 깨달은 이들이 하나둘 내려놓은 씨앗 덕분이지 않을까.
오늘은 오늘의 힘을 다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치앙마이에서의 석 달. 계절은 항상 눈부신 여름이었지만, 문 밖으로 나서면 때마다 다른 꽃들이 길에 떨어져 있었다.
태양이 늘 같은 모습으로 반겨 주었던 지난 석 달이, 내게는 모두 다 같은 계절 같은데. 바람이 다정하다 하여 꽃들은 아무 때나 피어나지 않고, 혹독한 겨울바람 불어 올 일 없으니 이왕 피어난 김에 이생에 좀 더 욕심 내어 머무르고 싶을 것도 같은데,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길 위에 떨어진다.
수북이 떨어진 꽃들을 사뿐사뿐 밟으며 나아가는 것은, 떠나야 할 때를 깨닫는 것.
꽃길 끝에 다다르니, 아무 때나 열지 않는 바나나튀김노점이 마침 문을 열었다. 긴 기다림 끝에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나 수분의 소임을 다하고 나면 꽃들은 더 이상 앞날을 탐하지 않듯, 이 거리의 가장 정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가야 할 길로 떠나라는 듯.
갓 튀겨 낸 따끈따끈한 바나나튀김 한 봉지를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순식간에 해치우고 도착한 미슐랭 어묵국숫집엔 오늘도 손님들이 바글바글하다. 혼자 조촐히 어묵국수 한 그릇 뚝딱 비우던 그새 정든 단골집, 오늘은 사람이 셋이니 국수 한 그릇씩에 어묵도 한 접시 주문했다. 그간 늘 먹던 것과 똑같은 국수를 주문했는데도, 여럿이 식탁에서 머리를 맞대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젓가락질을 하다 보니 그 맛이 사뭇 다르다.
붙임성 좋은 사장님은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와중에도 우리를 지나칠 때마다 잊지 않고 ‘마마! 음식은 어때?’ ‘마마! 덥지는 않아?’ 하면서 살갑게 말을 걸어 주었다. 유독 ‘마마’가 잘 먹었는지 신경을 쓰는 걸 보니, 베테랑 사장님은 가족이 함께 음식점에 오면 최종평가는 대개 ‘엄마’에게 달려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신 듯하다.
미슐랭가이드가 식당을 선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맛’이라고는 하지만. 맛이 기분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면, 그건 오히려 맛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거다.
혼자 방문했을 때는 그저 조용히 필요한 것들을 갖다 주던 종업원들이 마지막 날의 식사엔 함께 떠들썩하게 만찬에 발을 맞춰 주어, 그 언제나 부담 없이 들러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곤 했던 어묵국수는 ‘그 집 미슐랭 받을 만하지!’ 하고 치앙마이의 수많은 미슐랭 식당들 중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기억 속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그간 나 홀로 남몰래 애정했던 ‘미슐랭 옆집’이 오늘도 묵묵히 영업 중.
오늘도 뭉근하게 잘 익은 오리고기를 바로 눈앞에 두고 그냥 지나쳐야 하는 아쉬움은 뒤로 하고, 지나간 어느 하루에 소소한 기쁨이 되어 주었던 덮밥 한 접시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삼왕상 앞엔 오늘의 꽃들이 만발했다. 때가 되면 꽃은 모두 진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듯, 햇볕에 물든 꽃들의 자태가 해사하기만 하다.
때가 되면 꽃은 스스로 떨어져 씨앗이 힘겹게 싹을 틔워 낸 땅으로 돌아가지만. 그날이 바로 내일로 닥쳐온다 하더라도, 오늘은 오늘의 모든 힘을 다해, 꽃들은 이 얽히고설킨 세상 속에 선명히 자기만의 색을 피운다.
Copyright 2025 by 여름햇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