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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간들

맹목의 아름다움에 보내는 묵념

by 여름햇살

가장 자연스러운 거리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콘도 앞엔 오늘도 어김없이 행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금세 비어 버린 바구니들을 들고 썰물처럼 흩어졌다. 어젯밤 내게서 ‘콘도 앞 아침행상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아빠는 꼭두새벽부터 운동 겸 구경에 나섰던 모양이다. 식탁 위에 못 보던 초록색 풀빵이 놓여 있어 물어보니, 행상들이 이른 새벽부터 오밀조밀 부지런히 준비해 온 먹거리들을 구경하다가 이것저것 호기심이 생긴 것들을 사 보았단다. 연잎을 감싸 찐 찹쌀밥과 고기꼬치 등 우리 -한국인들- 눈에도 익숙한 음식들은 벌써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아침이슬 머금은 풀잎들을 쏙 빼닮은 초록색 풀빵은 어쩐지 천덕꾸러기 신세다. 엄마는 아빠가 고른 ‘빵 같지 않은 색깔의 빵’이 영 못 미더운 모양이다.



이 낯선 색깔의 풀빵은 ‘판단’이라고 하는 열대식물을 넣어 만드는데, 판단의 잎사귀로부터 온 초록빛은, 너무도 선명해서 때론 오히려 가짜처럼 보인다.


색깔이 지나치게 화려한 음식들은 으레 ‘저런 빛깔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나올 수가 있어? 색소로 억지로 만들어 낸 거겠지!’ 하는 의심을 부추기곤 한다. 특히 한국에선 이전에 한 차례 사랑스러운 분홍빛의 딸기우유가 실은 딸기가 아니라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의 암컷으로부터 추출한 색소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이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어, 나 역시도 그 뒤로 ‘너무 예쁜 빛깔’의 음식을 맞닥뜨리면 감탄에 앞서 ‘이게 자연스럽게 우러난 색깔일 리 없어’ 하면서 경계부터 하게 된 것도 같다.


연지벌레에서 얻어 낸 색소는 합성화학물질 같은 게 아니라 엄연히 ‘자연’으로부터 온 ‘천연색소’이고, 인체에 무해하기 때문에 식품에 사용해도 문제가 없지만, 모두가 선명한 분홍빛을 보며 응당 기대했던 ‘딸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이 밝혀지며 한국에선 한동안 딸기우유 매출이 줄어들기도 했었다.


길쭉길쭉한 잎사귀들이 뿌리에서부터 정갈하게 뻗어 나온 판단Pandan Leaf은 생김새는 난초와 매우 유사하지만, 자스민과 바닐라, 코코넛을 고루 섞은 듯한 우아한 향에 단맛까지 있어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선 오래전부터 젤리나 떡, 빵, 과자 따위의 디저트를 만들 때 애용해 왔다. 싱가폴을 대표하는 음식인 ‘카야잼’도 코코넛밀크에 판단을 넣어 만드는데, 판단잎을 물에 우려내어 만든 것은 연한 노란 빛깔을, 여기에 설탕을 태우듯이 하여 한층 더 진한 맛을 낸 것은 갈색을, 생 판단잎을 곱게 갈아 넣은 것은 초록빛을 띤다고 한다.


태국식 디저트가 –한국사람의 눈엔- ‘너무 말도 안 되는 초록색이다’ 싶으면 대개 ‘판단잎’이 재료로 들어가는데, 십여 년 전, 첫 태국여행에서 ‘도대체 판단이 뭔데 자꾸만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등장하는 거지’ 싶어 인터넷으로 사진을 찾아보았을 땐 좀처럼 그 정체가 믿기지 않았던 것도 같다. -한국에선 그 모습을 기품 있게 여겨 ‘사군자’라 일컫는 난초와 꼭 닮은 점잖은 잎사귀들이 이렇게 엄청나게 달콤한 디저트들을 만들어 낸다니!-


여름, 불 피우는 낮


불을 발견하며 인류가 섭취할 수 있는 칼로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생존에 쓰고 남은 ‘잉여의 칼로리’가 인간의 두뇌를 발달시키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비로소 꽃피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태 보자면, 인간을 지금의 ‘인간다운’ 형태로 만들어 준 그 ‘잉여의 칼로리’는 아마도, 인류가 ‘디저트’라는 것을 만들어 내면서 다시 한번 어마어마하게 불어나지 않았을까. ‘풍요’가 오히려 ‘병’이 되어 버린 지금 시대엔 새끼손가락만 한 케이크 하나에 밥 한 그릇보다도 많은 칼로리를 담을 수 있는 ‘디저트’가 이로운 것은 하나 없이 건강을 위협하기만 하는 ‘빈 칼로리Empty Calory’라며 지탄받고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디저트’를 처음 탄생시키며 가졌던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몸이 생존과 건강을 위해 필요로 하는 적정량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인류는 축재와 이기, 전쟁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는 데 꼭 필요하진 않은’ 디저트들이 굳이 인류의 역사를 비집고 등장한 이유는, 처음엔 그저 자연의 영롱한 빛깔과 향기들을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모르긴 해도, 그 탐스러운 빛깔들을 처음 식탁 위에 올렸던 사람들은, 밥 한 그릇보다 많은 칼로리를 한꺼번에 내 뱃속에 욱여넣는 탐욕과 이기가 아니라, 늘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 모든 작은 생명들과 진정으로 어우러지는 풍요로움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다하며 두 눈에 보이는 자연의 빛깔들을 있는 그대로 그릇 위에 빚어냈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환한 햇살 속에서 생기 띤 빛깔로 반겨주는 치앙마이의 초록이 판단을 넣은 풀빵과 꼭 닮았다. 인간이 일구어 내는 그 모든 것들의 뿌리는, 결국엔 인간을 둘러싼 자연.


초록의 그늘 아래


어느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음식들이 띠고 있는 빛깔은, 그곳의 자연이 인간과 동고동락하며 삶 속에 자연스레 스며든 것. 그 빛깔들이 보여 주는 것은,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가장 자연스러운 거리다.


초록빛 골목길 걷고 난 뒤에 더욱 반가운 선명한 초록빛 마차

길 위의 시간들


‘예술가들의 도시’로 불리는 치앙마이에 손님들을 모셨으니 그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예술가마을’ 반캉왓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어 다 함께 걸음했다. 사람이 셋이니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결국 ‘구경도 할 겸 걸어서 다녀와 보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삼십여 분을 걸어 도착한 반캉왓을 돌아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십 분.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했던 나들이는, 정작 스쳐 가는 길 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저 나무 꼭대기로부터 활짝 열린 부엌으로, 주렁주렁 과실들


야무진 손재주와 끈질긴 정신력으로 구석구석 세밀하게 완성해 낸 수공예품들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는 것도, 그림처럼 꾸며둔 카페에서 무릉도원에 온 것처럼 노닥이는 것도, 모두 특별한 나들이에 나선 오늘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었지만. 왜인지 걸음은 이름 모를 누군가 살고 있는 담벼락 옆 비좁은 골목길에서, 잡초와 덩굴이 아무렇게나 자라난 도로변에서, 저 멀리 지는 태양을 향해 탁 트인 공터에서, 더 오래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리하여 보이는


인생이란, 거쳐 가야만 하는 정류장들을 차근차근 계단처럼 밟아 오르며 가장 꼭대기의 마지막 정류장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뿌연 구름에 휩싸인 저 먼 산의 정상이나 사막 한가운데 빛나는 밤의 오아시스처럼, 어쩌면 그 마지막 정류장은 현실에서는 영원히 닿지 못할, 그저 너머의 이상일 뿐.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가는 길 위에서 보낸다.


저물녘의 회한들


해 질 녘, 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걸음은 자연스레 사원에 닿았다. 지는 해에 물든 물가는 고요한 참선에 빠져 있고, 닭들은 윤기 나는 깃털들을 뽐내며 마땅한 목적지도 없이 이리저리 부산한 걸음 중이다. 보아 하니 먹이를 찾아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다들 무어가 그리 분주할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허나 삶의 그 모든 의문들은,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것. 인간의 눈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어 보여도,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지금을 살아간다.


생의 묘미


일 년 내내 태양이 위엄을 부리는 이곳에선 좀처럼 우중충한 아침을 맞을 일이 없다. 눈을 뜨면 옥상 수영장에서 밤 사이 적당히 식은 선선한 바람맞으며 수영을 하고, 전날 작은 골목길들을 쏘다니며 이것저것 양손에 사 담은 것들로 여유로이 아침식사를 한 뒤, 정오를 불태운 태양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즈음이면 느지막이 오늘의 길을 나선다. 하루에 고작 식당 한 군데와 사원 한 군데, 혹은 시장 한 군데 다녀오면 그날의 일정은 모두 끝나는 조촐한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나이 든 부모님을 모시다 보니 혼자서는 가지 않던 명소들에도 부지런히 걸음했다.


코코넛마켓의 풍경들


‘남국의 휴양지’ 하면 누구나 응당 머릿속에 그려 보는 바로 그 모습대로 꾸며 놓은 ‘코코넛마켓’엔 알록달록 그림 같은 생기가 넘쳤고, 이른 저녁부터 손님들이 꽉 차 있던 이름난 태국황실음식점에선 화려하게 꾸며낸 진귀한 정성을 대접받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하지만 왜인지, 소문난 곳들을 찾아다니며 떠들썩한 며칠을 보내고 난 후 뇌리에 가장 또렷이 남아 버린 건, 지도를 보고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걸음한 명소들보다도, 길을 걷다 우연히 맞닥뜨린 노점에서 송골송골 이마에 구슬땀 맺힌 채로 혀를 데어 가며 먹었던 갓 구운 풀빵 한 봉지다.


용암처럼 끓어 넘친 모습에 발길을 멈추고 만


치앙마이에선 도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풀빵을 구워 파는 노점들을 만날 수 있는데, 지난 세 달 동안 마주치는 틈틈이 사 먹었던 풀빵들이 대부분 태국사람들을 꼭 빼닮은 온화한 맛이었던 반면, 그날의 풀빵은 가장자리가 과자처럼 바삭바삭해질 정도로 화끈한 온도로 구워 내어, 한 입 베어 물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코코넛밀크 반죽이 크림처럼 왈칵 넘쳐흘러, 마치 지글지글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그대로 입안에 가득 삼키는 듯했었다.


화끈하게 그을린


우리 앞에 도사린 불확실함들은 곧잘 인생을 어지럽히지만. 바로 그 미지가 불현듯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질 때, 그 ‘묘미’로 인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생의 고통과 불안을 끌어안는 법 또한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열흘간 각근히 맛본 갖가지 화려한 음식들의 기억이 희미하게 바래졌을 때에도 여전히 감각의 어느 언저리에 선명히 존재감을 새기고 있는 그날 그 풀빵의 맛은, 태양이 뜨겁게 달구어 놓은 그날의 거리를 꼭 닮은 맛이었다.


맹목의 아름다움에 보내는 묵념


똑같이 느리게 흘러갔지만 혼자일 때와는 사뭇 달랐던 열흘. 셋이 함께 거닐며 치앙마이 곳곳을 구석구석 누볐는데, 복닥복닥한 인간사의 무수히도 많은 풍경들을 제치고 결국에 사진첩 한 귀퉁이를 차지한 건, 길 위에서 각자 나름의 모습으로 분투하고 있는 생명들이다.


기생, 혹은 공생


땅에 떨어진 무수히 많은 씨앗들 중 하나가 싹을 틔운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지만, 생명을 얻고 뿌리를 내린 이상, 태어난 그 자리를 지켜내야 하기에 나무는 자신을 침범해 오는 그 모든 것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이미 정해진 터전을 쉽게 바꿀 수 없는 식물들에겐, 때로는 자신을 기꺼이 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살아남는 길이다.


꽃길을 걷는 것은, 소임을 다한 생명에 보내는 묵념


길 위에 수북이 떨어진 꽃잎들은, 인간에겐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한 철이 지났음을 의미하겠지만. 낱장이 되어 미련 없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치열하게 봉오리를 맺고 그 속의 꽃가루를 나누어 다음 세대를 싹 틔우며, 그 꽃은 결국엔 살아남은 것이다.


사장님... 오늘 장사 안 하시나요...?


한가해 보이는 고양이의 낮잠마저도, 살아남기 위한 것. 육식동물이지만 경쟁엔 너무도 불리한 자그마한 몸집으로 태어나 버린 고양이들은 상위의 포식자들이 곤히 잠든 밤을 틈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낮 동안엔 끊임없이 잠을 자며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비축한다.


산다는 것은, 맹목적인 것.


태어남이란 무수히도 많은 가능성 중에 맺어진 우연일 뿐이지만, 그 드문 기회를 손에 쥐고 말았기에, 그 모든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이토록 화려한 문명의 과실들 사이에서, 그 어떤 이름표도 붙여져 있지 않은 사소한 길 위의 풍경들 앞에 문득 멈추어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직 살아남기에만 몰두하는 그 맹목적인 순수가 소리도 없이 발목을, 눈길을, 붙잡기 때문.


마음을 절로 움직이는, 갓 태어난 생명들


‘살아냄’이란, 우리의 본능이자 의지이기도 하기에.


문명이 그 아무리 발달하여도 내일은 그 누구도 또렷하게 알 수 없고, 눈앞에 맞닥뜨린 오늘 하루는 여전히 치열한 살아냄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엔 그저 무심히 지나치다가도, 이따금 우리를 둘러싼 들풀과 나무와 냇물 앞에 멈추어, 우리와 같은 세상 속에서 함께 분투하고 있는 생명들에 고요히 이끌리곤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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