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여도
차 한 잔에 흐르는 시간들
오늘 밤비행기로 치앙마이를 떠난다. 열흘 전부터 부모님이 치앙마이생활에 합류해 함께 보내고 있지만, 다 같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오부터 해 질 무렵까지는 대개 각자의 할 일을 한다. 나는 이 시간을 주로 근처 찻집들에서 작업을 하며 보냈는데, 그새 정든 집들이 많아 ‘마지막 날’ 걸음 할 곳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향한 곳은 Magokoro Teahouse. 늘 주문하던 호지차라떼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 같은 호지차라떼도 찻잎이나 티백을 우려 만드는지, 아니면 분말을 사용하는지는 찻집마다 다른데, 이 집은 분말형태의 호지차를 사용해서 거품이 아주 풍성하다. -‘차선’이라 부르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솔로 분말이 곱게 풀리도록 잘 저어 주는 과정에서 거품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손재주에 따라 더욱 풍부한 거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게다가 넓적한 잔에 담아 주어 한 모금씩 차를 음미할 때마다 입술에 그윽하게 몰려와 포르르 포말처럼 부서지는 거품들을 꽤 오래 즐길 수 있다.
따뜻한 차 위에 구름처럼 풍성하게 떠 있는 거품들은 맑은 물에 동동 띄운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차를 좀 더 찬찬히 즐길 수 있도록 운치를 더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호지차의 유래는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은데,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침탈이 한창이던 1920년 무렵, 일본은 전쟁으로 단기간의 호황을 누렸지만 이후엔 장기적인 불황을 겪게 되었고, 아마도 그래서 이전엔 그냥 버려지던 ‘상품성이 떨어지는 잎사귀들’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던 것 같다.
그냥 우려 마시기엔 좀 시원찮은 찻잎들을 불에 볶아 구수한 맛을 내어 회생시킨 것이 바로 ‘호지차’의 시작인데, 맑게 우린 차가 ‘군자의 기개를 닮은 청한 맛’이라면, 곡물차처럼 구수한 호지차는 좀 더 ‘복닥거리는 서민의 삶’에 가까운 맛이 난다. 녹차는 그 등급이 높을수록 홀로 독야청청 이슬처럼 우려내어 마시는 것이 선호되지만, 호지차는 그 탄생부터가 ‘남은 잎사귀들의 부활’이기 때문인지, 우유와 섞거나 빵이나 과자 등에 넣고 구울수록 더 그 풍미가 넉살 좋게 살아난다.
일본은 농업침체를 겪으며 침략한 우리 땅에서 부족한 쌀생산량을 메우고자 산미증식계획을 실행했고, 일본 내에서 가파르게 산업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지며 우리나라는 식량공급처로서 더욱 가혹한 수탈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대에 탄생한 호지차가, 요즘은 한국에서도 부쩍 눈에 띄며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혹자는, 우리의 참혹한 역사가 어린 음료를 어찌 마음 편히 마실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 한 잔으로 인하여, 평소엔 태연히 잊고 지내던 백 년 전 그 시절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김질해 보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그 누구도, 그 어느 시절에도, 얽히고설켜 온 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것. 온 생애를 다해 하나하나 그 매듭들을 풀어가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그 수많은 매듭들을 전부 다 풀지 못하고 이생을 떠나게 된다 해도. 살아있는 동안은, 그 역겁들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질 그날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엔 떠나보낼 것들
작은 개울을 앞에 둔 채 호록 호록 온기 품은 고소함을 찬찬히 입안에 머금었다 떠나보내고, 또 머금었다 떠나보내려니, 왜 우리 조상님들이 ‘배산임수’를 최고의 지형으로 삼았는지 알 것도 같다. 비록 이 작은 물은 인공적으로 조성되어 그 어디로도 흐르지 않고, 등 뒤에 있는 건 미닫이문을 겸한 벽일 뿐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세 있는 자들은 항상 자신들이 터 잡은 곳에 나무를 캐어다 옮겨 심고, 땅을 파내어 물가를 지어 두지 않았던가. 철마다 무성하게 뻗어 나오는 나무의 가지를 치고,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면서, 인간은 길들일 수 없는 저 너른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 흐르는 소리 속에 녹음과 어우러져, 저 잎사귀들로부터 얻은 따뜻함 한 모금씩 머금고 또 떠나보내며 진정 깨닫는 것은, 우리 역시도, 저 거대한 경관의 일부라는 섭리.
자연은 때론 인간은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재해를 일으켜 애써 지은 터전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인간의 역사란, 그 불가항력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해 내고 싶다는 끈질긴 욕망과 받아들임의 수행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며 쓰이나 보다.
Khom Chocolate의 70% 다크초콜릿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실은 마지막 오후를 보낼 찻집을 두고 Khom Chocolate과 Magokoro가 내 마음속에서 끝까지 박빙의 대결을 했는데, 숙소에서 좀 더 가깝고, Khom Chocolate의 초콜릿음료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결국엔 Magokoro가 오늘의 목적지가 되었다.
분명 같은 재료와 레시피로 만들었을 텐데, 물가에서 마시는 핫초콜릿은 좀 더 술술 흘러가는 맛.
조금 낮은 천장 아래 하얗게 늘어뜨린 커튼 사이로 말없이 새어 들어오던 수줍은 한낮의 빛이 진한 초콜릿을 더욱 진하게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주었었나 보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정취에 젖어들고 싶지만. 네모난 핸드폰 속에 별표로 가득한 지도를 펼치면, 아직도 가 보지 못한 곳들이 많고도 많지만.
이제는 갈무리해야 하는 때.
결국에 떠나보내고 말 것들은, 미련 없이 이곳에 두고 가라고. 마지막 핫초콜릿은 작은 개울 따라 내게서 술술 흘러갔나 보다.
눈앞엔 낙원이 없다 해도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보낸 겨울 한 철이 그 끝을 목전에 두었다. 이다음에 찾아올 계절은, 꽃피는 봄이 될 수 있을까.
요즘 말로 붙인 표제는 ‘치앙마이 세달살이’고, 내가 붙인 부제는 ‘늙어서 살고 싶은 곳에 미리 가서 살아 보기’였던 여행. ‘늙어서’라는 단 세 글자로 어렴풋이 상상해 본 그때가 과연 언제일지, 그때의 내 건강은 어떨지, 경제적 형편은 어떨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셀 수 없는 날들이 지난 후에, 막연한 미래의 어느 날엔 꿈꾸는 것들이 이루어져 있기를 바라는 것은, 현재엔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치앙마이에서 흘러가는 시간 따라 보낸 세 달 동안에 진정 들여다본 것은, 지금 당장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어떤 곳이기를 바라는지, 진흙 속에 잠자고 있는 연꽃의 씨앗들처럼, 잠잠히 묻혀 있는 내 안의 바람들이었나 보다.
길 위의 초록들과 그 사이사이 정답게 터 잡은 단골집들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계절 내내 넉넉한 햇살과 너그러운 바람에게도. 우리 사는 곳이 만약 일 년 내내 온화한 여름이었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햇살처럼, 바람처럼, 넉넉하고 너그러울 수 있었을까.
오늘 내 몸 뉜 곳이 낙원은 아닐지라도.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는 삶의 궤적들이 모여 쌓아 낸 터가, 다음 세대에겐 좀 더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기를.
노을빛 만찬, 녹음빛 만찬
숙소 가까이에 있는 딤섬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이전에 혼자 방문했을 때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튀김을 좋아하는 부모님과 함께 오면 괜찮겠다 싶어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던 곳인데, 이 집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긴 것부터 개성이 넘치는 튀김이 아마도 이 딤섬집만의 시그니처요리인가 보다. 통통한 새우를 만두피로 감싸고 독특한 모양으로 자른 뒤에 튀겨서 바삭거리는 식감을 극대화했다. 고급식당에서 멋지게 플레이팅해서 대접해도 그럴듯할 것 같은 아이디어인데, 동네식당의 소박한 접시에 담아 먹으니, 해 질 녘 저 밖의 거리에 따끈하게 스며든 붉은 노을빛을 닮은 맛이 난다.
치앙마이에서 먹은 음식들 중 꼭 다시 먹고 싶은 것을 꼽으라면 단연 1등을 차지할 쫄깃한 전분을 넣은 굴전도 맛 보여 드리고, 언제 가든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하는 인기만점 창푸악 수끼도 포장해 와 먹었지만, 엄마아빠가 제일 좋아했던 건 목적지 없이 나선 산책들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은 상점들에서 그날그날 텃밭에서 따온 듯한 여름채소들을 구입해 뚝딱 만들어 먹었던 요리인 것 같다.
‘태국식 젓갈’이라고 불리는 피쉬소스엔 한국식 젓갈과 간장을 딱 반반씩 섞은 듯한 적당한 감칠맛이 있어서, 그 어떤 요리도 순식간에 깊은 맛이 나도록 만들어 준다. 아삭아삭함과 달큰함이 살아있는 신선한 야채요리에 녹두를 넣고 지은 자스민 쌀밥을 곁들이면, 포근한 여름햇살에 몸과 마음까지 고루 영근 듯,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든다.
지고 갈 것들과 남겨 둘 것들
떠나는 짐을 싸며 ‘지고 갈 것들’을 하나하나 여행가방에 담다 보니, ‘예술가들의 도시’에서 석 달이나 머물면서 식료품만 잔뜩 사서 쟁여 두었다. 쌀국수로 만든 태국식 라면은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내가 태국에 올 때마다 종류별로 잔뜩 사 가는 품목. 세달살이를 하는 동안은 굳이 라면을 끓여 먹을 일이 없었지만, 3월 첫 주의 한국은 아직 쌀쌀하니, 돌아가면 이 녀석들이 제법 요긴할 것이다. 늦은 겨울밤, 찬바람에 시달리며 집에 돌아왔을 때, 물만 끓이면 금세 뚝딱 완성되는 라면은 램프의 요정처럼 살가운 존재.
치앙마이에서 머무는 석 달 동안 가장 자주 걸음했던 카페를 꼽으라면 단연 Khom Chocolatehouse인데, 실은 그보다 더 큰돈을 쓴 카페가 있다. 초콜릿 카페 겸 상점인 Kanvela인데, 치앙마이를 비롯 태국 각 지역에서 재배한 카카오로 만든 크래프트초콜릿과 더불어 기존 초콜릿들에선 보기 힘든 향신료들을 넣고 태국의 유명음식들의 맛을 재해석한 독특한 초콜릿들을 판매한다. 포인트는, 이 다양한 초콜릿들이 대부분 비건이라는 것!
치앙마이에서 꼭 먹어 보아야 할 음식 중엔 코코넛밀크에 향신료를 넣고 옐로우커리처럼 걸쭉하게 끓여 낸 국물에 밀가루에 계란을 넣어 노르스름하게 뽑아낸 국수를 넣고 소고기나 닭고기 등을 고명으로 올려 주는 국수요리가 있는데, Kanvela에 이 ‘카오소이’를 재현한 초콜릿이 있었다!
부드러운 향과 달달한 맛을 지닌 코코넛밀크야 쌉싸름한 카카오와 찰떡궁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의외로 강황이나 큐민 등 커리를 만드는 향신료들이 ‘초콜릿’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태국음식엔 빠질 수 없는 라임도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이 카카오와 만나면 더욱 그 개성이 살아나며 입맛을 돋워 준다. ‘국수’에서 영감을 받은 초콜릿들엔 쌀을 튀긴 라이스퍼프나 튀긴 쌀국수조각 등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 역시 쌀로 만든 뻥튀기를 즐겨 먹는 한국인에겐 그리 낯선 조합이 아니다.
덕분에, 카오소이를 먹지 못하는 나도 카오소이 초콜릿은 원 없이 먹었다.
튼튼한 만듦새에 치앙마이만의 정취를 듬뿍 담은 공예품들도 눈길을 끌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 내가 기꺼이 지니기로 택한 것은, 이 토양에서 수천 년을 이곳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살아남아 온 맛.
돌아갈 짐을 꾸리며, 다음을 꿈꾸어 본다. 치앙마이의 카카오산지들을 둘러보는, 나만의 여행. 뚜벅이로는 조금 어렵겠지. 최소한 오토바이라도 한 대 있어야 할지 모른다. 운전면허도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한 ‘다음’.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마음은 오히려 더 뭉게뭉게 어렴풋한 희망들로 가득해진다.
치앙마이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지만, 초콜릿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들이 제법 여럿 있는데, 방문했던 상점들이 전부 각각의 개성이 매우 뚜렷했다. 개중엔 아쉽게도 한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던 상점도 있는데, 이곳 Siamaya Chocolate은 초콜릿의 원형이며 고대 마야와 아즈텍문명에서 제의에 사용했던 음료 ‘쇼콜라틀’을 재현한 듯한 매운 고추를 넣은 초콜릿이나 알싸한 향신료의 맛이 살아 있는 ‘마살라차이초콜릿’ 등 조금 더 ‘어른의 쌉쌀한 맛’을 물씬 풍기는 초콜릿 라인업을 갖추고 있었다.
* 쇼콜라틀 이야기가 좀 더 궁금하다면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69
이 상점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건 카카오를 발효시켜 만든 식초인데, 호기심에 한 병을 사 두곤 결국 공항에서 원샷!을 하고 말았다. 상점에서 식초를 구입한 다른 초콜릿들과 함께 종이백에 넣어 주었는데, 짐을 꾸릴 때 안에 100ml를 초과하는 액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만 봉투째로 기내용 가방에 넣어 버린 것이다.
보안검색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뚜껑을 열어 원샷한 180ml의 카카오식초는 다행히도 산이 그리 강하지 않았고, 발효과정에서 탄산이 적당히 발생해서, 단맛이 적고 좀 더 톡 쏘는 콤부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요리에 써야겠다거나 하는 목적을 딱히 정해 두고 구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쉽게 구하기 힘든 ‘2년 숙성 카카오식초’를 이렇게 허무하게 원샷해 버리다니!
식초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문화권에서 예로부터 소독과 정화를 의미해 온 음식이기도 한데. 다시 서울의 복잡한 일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전에, 치앙마이를 떠나며 남김없이 온몸을 씻어 내라고 일이 그리 되었던 걸까.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예기치 않게 벌컥벌컥 들이켜고 만 쌉쌀한 카카오식초가, 치앙마이의 마지막 음식이 되었다.
밤의 운하는 말없이 인사를 건네고
공항으로 떠나기 전, 운하에서 마지막 산책을 했다. 나 홀로 훌쩍 시공을 건너 여름 한가운데 뚝 떨어졌던 세달살이의 첫날, 고요히 잠든 하이야Haiya의 Dayoff House에서 당당하게 ‘냥국심사’를 하러 내 방에 들어왔던 고양이어린이를 꼭 닮은 치즈고양이 한 마리가 이번엔 떠나는 길을 배웅해 주었다.
* 세달살이 첫 주에 만났던 고양이어린이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19
길목마다 동네고양이들이 스스럼없이 달려와 열심히 몸을 부비며 환대와 연대를 표해 주었던 빠이의 기억들이, 어느새 희미해졌다. 치앙마이로 돌아와 지내는 동안 조금은 멀어진 털북숭이 동네친구들과의 거리는, 서울로 돌아가고 나면 아마도 더욱 멀어져 버릴 것이다.
* 빠이의 사랑스러운 동물친구들 이야기는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34
길 위의 우연한 만남들엔, 모두 아무런 기약이 없는데. 황금빛 털을 뽐내는 자그마한 동네고양이가 지키고 있는 이 길목을 벗어나고 나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서, 치앙마이를 영영 떠나게 될 거라는 사실에 예견된 헤어짐이 덜컥 아쉬워진다.
내일 다시 만날 약속이 없어도, 고양이들은 순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데 충실하다. 떠나는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아, 새삼 생각했다. 훌쩍 다가왔다가 다시금 훌쩍 떠나는 모든 것들에, 이 자그마한 아이들은 어떻게 매 순간 충실할 수 있는지.
혹자는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이라서 그렇다’고도 하지만. 지난 세 달 동안 빠이와 치앙마이에서 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동네친구들’과 교류하며 깨달은 것은 ‘고양이는 늘 사람을 관찰하고, 따라 하며, 비록 인간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인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자신들만의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고, 그 어떤 동물들보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려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독립적’이라는 것은, 어쩌면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일 터. 고양이들이 단지 자신들이 표현해야 할 것들에 순간순간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다름을 이미 깊이 포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운하를 등지고 돌아선 순간, 구석진 벤치에 불쑥 찾아온 낯선 이들이 다시금 불쑥 일어나 떠나도 태연히 그루밍에 빠져 있는 작은 고양이가 답을 주었다.
우리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여도. 그 언젠가 다시금 이 땅에 돌아온다면, 그때는 새로이 태어난 생명들이 기꺼이 새 손님을 반갑게 마중해 주겠지.
오늘은 그저 오늘의 일과에 충실한 고양이들처럼.
오늘의 떠남에 충실하며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Copyright 2025 by 여름햇살 All Rights Reserved
* 2023년 겨울 치앙마이에서 보낸 석 달을 기록한 <늙어서 살 곳을 찾아요> 첫 시리즈는 본 5권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약 일 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함께해 주신 분들께 고마운 인사를 전합니다. 연재 후반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바로바로 답을 드리지 못했네요. 댓글은 모두 소중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잠시 휴식 후 새로운 시리즈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뵙는 날까지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