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비만 보면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 맞으며 친구들과 뛰어노는 일은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일탈 중 하나였고
그래서인지 빗소리는 늘 나를 설레게 했다
달리는 일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잠시 잊고 있던 그 두근거림을
요즘 다시 느끼곤 한다
비 맞으며 달리는 것을
업계 용어(?)로 우중런이라 한다.
러너들 사이에서도
우중런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빗 속을 달릴 때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는 왜 사서 고생하냐고도 한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대부분의 사서 고생은
그 (조금은 쓸데없는) 고생의 크기만큼
값진 무언가를 남기곤 했다.
우중런도 그러하다.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장대비를 뚫고
목표했던 만큼을 완주하고 나면
대회 하나 끝마쳤을 때나
느낄법한 감정이 올라온다.
빗 속을 함께 달린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뜨거움은 아마 그 감정의 연장선일 것이다.
더불어 우중런을 할 때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예민한 상태로 달리게 되는데
그렇게 날카로워진 감각은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법한
중요한 것들을 되새기게한다.
개인적으로는 비가 오면
청각이 예민해지는 편이다.
그래서 비를 맞고 달릴 땐
숨소리와 발 내딛는 소리에
훨씬 밀도 있게 집중할 수 있다
유독 비 오는 날
개인 기록을 많이 세웠던 게
이와 전혀 무관할 것 같진 않다.
러너에게 비 오는 날이란
뛰지 않아도 되는 타당한 이유이자
훌륭한(?) 핑계거리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뛰고 싶게 만드는,
자연이 내던지는 훌륭한 미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미끼를 매번 덥석 물고있다)
오늘도 쏟아지는 비를 보며
입으로는 '에이~못 뛰겠네'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 그래도 뛰고 싶다'
비 오는 오늘은 러닝이 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