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N 3월호
특별한 광고 문구를 봤다. “무료 교육 안내–가요(트롯) 민요 동요 장구가락 장단교육”. 민요, 동요는 알겠는데 가요? 여기에 트롯이라니 장구의 영역이 이렇게 넓었던가. 보통 사물놀이 가락을 배우지 않나. 이것이 지자체가 지원하는 문화강좌라니. 아하, 우리 동네 중국집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열심히 치는 트롯 장구는 여기에서 배운 것이 틀림없다!
뭔가 뇌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이 문구는 웃음 너머로 어떤 깨달음을 얻게 하였다. 혹시 국악이라는 영역을 (또는 시장을) 한정 지어서 생각했던 건 아닐까? 트로트 부르면서 치는 장구는 국악인가? 국악기로 연주하는 락은 국악인가? 창극은 결국 뮤지컬이 아닌가.
그러니까 국악은 장르가 아니라 국악이라는 생태계 안에 궁중, 풍류, 민속예술을 포함한 고전 음악, 퓨전, 락, 팝, 인디밴드, 뮤지컬과 연극의 사이쯤 되는 창극·소리극·음악극 그리고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연희. 이미 다양한 음악 장르가 포진된 것이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연예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공연예술에서 국악의 공연 건수는 7.6%, 장르별 티켓 판매수에서는 2.7%에 이른다. 처참한 수준이다. 점유율이 10%도 채 안 되는 국악이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있다니 과도한 세포분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국악의 최신 트렌드를 논할 수 있을까 싶지만 흥미롭게도 그 어떤 분야보다 뜨겁고 활발하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랄까. 양악처럼 쇼팽 같은 기존의 레파토리를 소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연극처럼 새로운 작품을 쏟아낸다고 관객의 사랑을 보장할 수 없다. 어떤 국악은 플레이리스트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떤 국악은 퍼포먼스에 가깝다. 그만큼 다양한 표현력을 국악으로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희한한 현상을 포착해보자.
먼저 경연과 TV매체를 통한 소리꾼의 부각이다. 해방 이후 국악의 흐름에서 기악이 주도했던 적이 있다. 이는 대학에서 엘리트 음악가를 키우는 과정에 잠시 주도했을 뿐 대중들에게 가까운 이들은 원래 노래였다. 19세기 판소리 8명창이나 일제강점기 레코드판에도 남긴 김창룡, 이동백, 이화중선을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TV의 경연 프로그램은 국악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스트롯의 ‘송가인’을 기점으로 성공하려면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각성이 생겼다. 이후 국악인들의 경연 프로그램 도전이 늘어났다. 그 정점은 ‘풍류대장’이다. 기존 퓨전음악 풍의 밴드 음악이 점차 심사위원으로 대변되는 청중을 의식하고, K-팝의 메커니즘을 일부 수용하면서 놀라운 장면이 종종 등장했다. 자기 색깔을 찾아 음악을 하는 흐름이 포착되었고, 서도밴드, 구민지, 최예림과 같이 스스로 서사를 만드는 이들이 나타났다. 소리수련으로 다져진 가창력과 극적 표현력이 발휘될 기회가 없었을 뿐 경연에서 이들의 활약은 당연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도전을 기꺼이 즐기고 국악인들은 조금씩 대중의 감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창극의 활약은 대단하다. 국립창극단은 기존 레파토리의 변용에서부터 웹툰 원작의 <정년이> 같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극으로 만들고, 새로운 주역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내면서 관객 유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뮤지컬 시장이 확장되면서 비슷한 유형의 공연예술인 창극에도 영향이 있는 것일까? 김준수, 이소연, 유태평양, 김수인 배우의 팬덤이 생기면서 커피차가 등장하고, 특정 배우의 캐스팅을 보기 위해 티켓팅이 치열해졌다. 창극뿐만 아니라 이자람, 입과손, 박인혜의 소리극은 작품의 완성도와 더불어 시대 정신을 담아내며 많은 공감을 일으켰다.
기악의 흐름을 보자. 연주자의 창작이 주가 되는 팀들이 여전히 확장되고 있다. 진짜 국악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대학커리큘럼에서 벗어나 민간풍류, 잡가, 굿음악, 풍물을 익히고 창작의 소재로 삼는 팀들이 생겨났다. 또 철현금이나 양금 같은 특수악기도 급부상했다.
유학을 통해 음악색깔을 찾는 이들도 생겼다. 국악전공자들의 유학은 음악인류학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 즉흥음악·재즈와 같이 연주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국악을 기반으로 하되 다양한 음악적 표현을 가져오는데 주목한 것이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음악을 해체하거나 소리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강렬해지면서 이것이 과연 음악의 범주인가 싶은 퍼포먼스도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퓨전국악은 유투브나 쇼츠로 유입되었다. 감상자를 겨냥하여 만든 음악이다. 쇼츠는 클릭수가 곧 돈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가요나 탱고, 또는 서유럽음악을 편곡하여 연주하고, 외모 관리가 필수이며 짧은 시간 내 사로잡을 킬링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야금야금’의 성공과 함께 젊은 국악인이 여기에 뛰어들었다. SNS로 소비되는 국악은 일상적이고 유입에 대한 문턱이 낮기에 다수와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통음악도 변화가 보인다. 지금까지 이들의 생존 방식은 연주목적을 상실했으니 음악만 떼어 무대화하거나, 대학 커리큘럼 혹은 콩쿨곡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음악과 함께 문화를 가져왔다. 국립국악원의 <나례>, <종묘제례악>, <사직제례악>은 과거 문화의 맥락을 살피면서 음악의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국악관현악도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 6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국악관현악은 한때 존재에 대한 회의가 팽배했다. 그런데 지난 2023-24년 ‘국악관현악축제’를 통해 젊은 지휘자의 세대교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곡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단원의 기량이 확장되면서 지휘자의 음악적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국악관현악이 국악의 한 분야로서 탄탄히 다져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2025 영동세계국악엑스포에서 유수의 국악관현악단이 한데 모인다고 하니 주목해 보자.
이 땅의 음악환경이 모조리 갈아 엎어진지 벌써 한 세기에 가깝다. 존재의 위협을 느껴가며 국악은 살아남기에 주력했다. 반면 K-콘텐츠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오히려 아이돌은 정체성 발현을 위해 국악적 요소를 끌어온다. BTS의 슈가는 <대취타>를 부르고, 뮤비에서 블랙핑크 지수의 거문고 연주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질적인 문화를 섞는 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소스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서태지의 <하여가>가 장르간 섞임을 의도했다면, 지드래곤의 <늴리리아>는 민요 자체가 창작의 씨앗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악창작에서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문화의 경계가 충분히 흐려졌고, 젊은 세대가 갖는 국악에 대한 무거운 의무감보다는 창작자의 음악적 취향이나 표현이 강화되고 있다. 향유자 역시 점점 국악을 여러 장르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자신만의 취향으로 선택하니 다행이랄까.
음악은 사회적 흐름과 같이한다. 음악이 음악만으로 사랑받는 시대는 지나고 향유하는 플랫폼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경험적 감상이다. 관객과의 감성적 공유가 이루어지고 명확한 메시지가 있다면 계속 찾게 되고 그 음악은 살아남는 것이다. 지원금 받고 치루는 1회성 공연은 지양하고, 작가적 마인드를 가진 예술가의 지속성이 드러나면 좋겠다. 콘텐츠의 연결은 중요하다. 여기에 공연장의 음악이 음반, 굿즈, 그리고 청중이 소통할 공간으로 잘 연결된다면 어떨까. 옴니보어인 나도 국악 덕질 좀 해보게.
구수정. 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
*이 글은 세종문화N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