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선택한 것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고, 필요하다면 휴가를 더 주겠다고 말씀해주셨다. 퇴직 후 알게 된 작은 회사에서는 나를 위한 부서와 직책을 만들어 줄 테니 입사해 달라고 부탁했고 좀 더 큰 회사에서는 직급을 올려 연봉 테이블을 맞춰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높은 연봉과 대우가 내 아이를 대신 키워줄 수는 없었고 나는 내 커리어를 버렸다.
다행인 것은 내게 나를 깊이 사랑하고 책임감으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비록 결혼 전 주식으로 큰 돈을 날려 내 친구들에게 미움을 샀지만 다시 주식에 손을 대지 않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에 임했다. 우리 할머니도 옆집 할아버지도 아는 대기업에, 그것도 돈을 아주 잘 버는 부서에서 일하게 된 그는 매년 꽤 괜찮은 연봉과 훌륭한 보너스를 타왔다.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워 고된 육아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금방 산용 대출을 다 갚은 우리는 낡은 원룸에서 보다 깨끗한 빌라로 이사했다. 창문이 세 개나 있고 전보다 볕도 잘 드는 집이었지만 햇볕이 산후우울증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 즈음의 나는 돈이 있어도 쓸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그 집에서 아이와 남편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했다. 솔직히 그 즈음 생활비가 얼마였는지 통잔 잔고가 얼마였는지 역시 알지 못했다. 남편이 보너스를 받아 빚을 갚았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퇴직을 하고 싶단다.
함께 공원을 산책하던 어느 밤이었다.
그는 대기업에서 일하기가 힘겹다고 했다. 대기업 특유의 쳇바퀴 같은 환경, 정해진 업무만 해야하는 상황, 답답한 메뉴얼 등으로 그는 힘들어 했다. 나는 기꺼이 남편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쳇바퀴 같은 환경, 정해진 업무, 답답한 환경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집안에 갖혀 아이를 키우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은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중소기업으로 이직했다. 소리 소문 없이 폐업해도 인터넷에 기사 한 줄 나올까 말까 한 작은 회사였고, 당연히 연봉도 깎았다.
나 역시 중소기업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큰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3개월 정도 다녔던 회사였다. 전 직원이 30여 명 정도였던 회사였는데, 당시 내게 2천만 원을 연봉으로 주면서 너니까 많이 주는 거라고 으스댔었다. (놀랍게도 나를 그 회사에 소개해 준 선배보다 몇백만 원이 더 많은 연봉이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나름대로 인터넷에 기사 몇 줄이 나기도 했던 스타트업이었으나 얼마되지 않는 그 자그마한 월급조차 주지 못했고, 내가 큰 회사로 이직하고 얼마되지 않아 소리 없이 사라졌었다.
남편은 대기업을 그만둔 후 전보다 크게 활기차졌다. 의욕적이었고,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래, 혹시 월급이 밀리면 내가 애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지' 생각했다. 돈이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어차피 돈 쓰는 일에는 소질도 없는데 빚을 조금 천천히 갚으면 그 뿐이었다. 수천만 원에 이르던 보너스는 사라졌다. 하지만 원래 그 돈이 오는 줄도 가는 줄도 몰랐던 내게는 크게 체감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깨어 있는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야하는 직장생활이 즐거워야 하고, 내 반려인 남편이 행복해야 나 역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 뿐이었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편 지인들까지 놀라 남편을 다그쳤다. 요즘 같은 때 그렇게 좋은 직장을 때려치는 게 어디있느냐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고개를 저으며 그 어떤 대기업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편은 보란 듯이 한 번 더, 전보다 더 작은 회사로 이직했다.
남편은 다시 이직을 하면서도 연봉을 깎았다. 남들은 연봉을 올리려고 이직을 한다는데, 매번 이직할 때마다 연봉을 깎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대신 이번 회사는 남편에게 깎은 연봉 대신 회사의 주식을 주었다. '스톡 옵션'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당장 팔 수 있는 주식도 아니었고 회사에 몇 년을 근속해야 된다고 했다. 세상에, 작은 회사라더니 사람 붙잡으려고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이놈의 회사가 언제 망하고 이 회사를 얼마나 다닐지도 모르는 판에 당장 팔지도 못하는 주식이라니.
남편이 이직한 회사는 전에 다녔던 회사보다 더 작았지만 그만큼 더 자유롭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그것을 무척 즐거워했다. 회사 분위기가 좋아보였다. 남편은 함께 회사에 다니는 동료들과 가끔 어울려 술을 마셨고 나 역시 남편의 회사 동료들 사이에 끼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회사라기보다는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행히 월급도 밀리지 않았다. 남편은 행복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내가 행복하니 남편도 행복했다. 우리는 더할 나위 없었다.
회사 분위기가 좋고 월급이 밀리지 않은 덕에 남편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두 아이가 훌쩍 자라 우리는 학부모가 되었다. 그렇게 얼레벌레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우리 회사 상장한대요."
"오, 그렇구나. 축하해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서 축하를 전했다.
지금이야 관심 있는 기업 IPO를 챙겨보고 공모주 청약도 열심히 하는 나이지만 당시에는 상장이 무엇인지, 주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상장이라니까 회사 이름이 조금 더 유명해지겠구나 싶은 생각 정도나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월급 대신 받은 회사 주식이 몇 주 정도인지, 이게 어느 정도 비싸질 수 있는 것인지 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