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를 먹고 자란 나는, 돼지고기 알레르기였다
"나 A형이래".
고등학생 때, 평생 자신이 B형인 줄 알았던 친구는 검사 결과 A형이었다. 어떻게 자기 혈액형도 모를까 싶은데, 자신이 당연하게 믿고 있던 일이 사실 아니었던 경우는 삶에서 제법 빈번하게 발생한다.
오늘의 나는, 마치 혈액형이 바뀐 것만 같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생애 첫 내시경이고, 제대로 건강검진을 받은 건 처음이다. 결과가 나왔다는 안내 문자를 받고 괜히 불안했다. 혹시라도 나쁜 결과가 있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심각한 전화 대신 문자로 통보 온 걸 봐서는 별 거 없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요약된 결과를 보니 이상은 없다. 초음파 결과 갑상선과 복부에 아주 작은 뭔가가 있다는데, 심각하거나 나쁜 정도는 아니어서 지켜봐야 한다고 한다. 근육에 비해 지방이 많다는, 늘 들어왔고 예상 가능한 결과도 포함하고 있었다.
내게 충격을 준 건 알레르기 검사였다. 기본 검사 외에 추가 검사로 선택 가능한 것 중 대장내시경과 알레르기를 선택했다. 결과지 마지막쯤에 있는 알레르기 검사지를 보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Class 2 : 말
Class 3 : 돼지고기, 생쥐&쥐, 햄스터
내가 말과 접촉할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겠는가. 생쥐나 쥐는 영원히 안 만나고 싶고, 햄스터도 쥐처럼 보여서 앞으로 함께할 일이 없을 거다. 동물들이야 사실 접촉할 일이 없으니 썩 걱정이 안 된다.
돼지고기?
먹는 것 중 무엇이 나올까 싶었는데, 돼지고기라니. 내가 돼지고기 알레르기라고? 돼지고기에 대한 수치는 4.23으로 3등급(보통/조금 높음)이다. 보통보다 조금 높은 정도니까 엄청나게 나쁘지는 않겠다고 느끼면서도, 이 사실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돼지고기를 먹고 자랐으니까.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었으니까. 어제 먹은 까르보나라에도 돼지고기가 들어있었고, 오늘 먹은 만두 속에도 돼지고기가 들어있다. 지금 내 냉장고에 있는 음식 중에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냉동식품이 거의 없고, 내일 먹으려고 사둔 돼지고기 부속고기도 있다.
그런데 내가 돼지고기 알레르기라고? 누군가와 이별을 할 때도 이 정도로 심하게 부정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에 한약을 먹느라 돼지고기를 끊고 지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내 삶은 돼지고기와 함께였다는 걸. 그리고 바깥 음식 중에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내가 그동안 섭취한 음식들을 정리해보자면 결국 돼지고기의 비율이 제일 높을 거다.
사랑하지만 이별해야 하는 기분이다. 자꾸 부정하게 된다. 알레르기라지만, 거의 매일 돼지고기를 먹었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두드러기가 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고기를 너무 사랑하셨고, 매 끼니마다 고기가 없던 적이 없다. 나도 그런 집안에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육식주의자가 되었다. 아주 긴 시간 돼지고기를 먹고살았으니 내 몸도 면역이 생기지 않았을까. 돼지고기를 아무리 먹어도 딱히 아픈 곳은 없었는데. 합리화를 해본다.
"어떤 고기를 제일 좋아해?"
이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늘 돼지였다. 소와 닭도 좋지만, 결국 나의 마음은 돼지를 향해 갔다. 돼지고기 무한리필 집에 가서 삼겹살과 항정살을 먹는 건 거의 매주 있는 일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먹을 수 있고, 매일매일 먹을 수 있었다. 내게 돼지란 그런 거다. 어쩌면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돼지고기를 사랑했다.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거다. 이별했다고 사랑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단숨에 끊을 수는 없을 거다. 그러기엔 이미 냉장고에 미리 사둔 돼지고기도 많다. 이것까지만 다 먹자, 라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막상 알레르기 결과를 받으니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다. 이전까지 잘 먹던 게 괜히 마음에 걸린다. 오늘도 알레르기 결과를 보고 나니 괜히 점심에 먹은 만두 속 돼지고기가 떠올라서 몸이 간지러웠다. 인간은 역시 믿는 대로 느낀다.
독립하고 본가에 있을 때보다 더 건강해졌는데, 아무래도 본가에 있을 때보다 배달음식을 덜 먹고 소식을 하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알레르기 검사 결과를 보니, 돼지고기 섭취량이 줄어서 그런 건가 싶다. 이미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건강을 엄청나게 아끼는 내 입장에서는 돼지고기를 이전처럼 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돼지고기에 대한 애정보다 내 몸에 대한 애정이 더 큰 게 사실이니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김치찌개라고 답한다. 여기에는 괄호치고 '돼지고기'가 생략되어 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내가 아는 최고의 음식이다. 사실 돼지고기가 메인이고 김치는 보조 역할이다. 대학생 때 가장 열심히 먹던 음식은 돼지국밥이다. 먹고 싶은 메뉴를 물을 때면 제육덮밥이라고 답할 때가 많다. 독립하고 나서 내가 먹은 음식들에는 대부분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다. 이미 내 삶에는, 내 음식 취향에는 너무 많은 돼지고기가 포함되어 있다. 내 몸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서 돼지고기의 역할을 절대적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그리면서 한 번도 돼지고기를 제외시킨 적이 없다. 나의 식탁에는 늘 돼지고기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일 나의 점심 메뉴도 돼지고기였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돼지고기와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오이는 알레르기가 없는데, 돼지고기는 알레르기가 있다니.
나를 아프게 하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건 서글픈 일이라는 걸, 알레르기 검사 결과지를 보며 느낀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김광석의 노래가 떠오른다. 최근에 내가 겪은 그 어떤 이별보다 이보다 더 절절하게 다가오지는 못할 것 같다. 생활에 깊게 들어와 있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 가장 아픈데, 돼지고기야 말로 내 삶에 가장 깊게 들어와 있으니까.
이별해야 할 이유가 너무 명확한데, 그러나 내가 너무 사랑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랑하지만 보내 줄 수 있다는 그런 말을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별을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계속 사랑하면, 나는 아프게 될 거고, 나쁘게 될 거다. 이미 이 사랑의 맛을 아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 없고 지속해왔는데 멈춰야 한다는 사실에, 내가 겪은 그 어떤 이별들보다도 크게 아프다.
유난 떠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므로, 밖에 나가면 아무렇지 않게 돼지고기를 먹을 거다. 그렇게 가끔 재회를 하게 될 거다. 그때 나는 다시금 이별을 실감할 거다. 이렇게 맛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원망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며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거다. 완전한 이별을 아니겠지만, 집에서든 밖에서든 늘 삶을 같이 하던 존재와 거리를 두고 뜸해진다는 건 아픈 일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사랑했던 돼지고기와 멀어지기로 했다. 죽기 전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묻는다면, 나는 아마 돼지고기라고 답할 거다. 그만큼 사랑했고, 함께 해왔으므로.
나는 오늘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을 결심했다.
안녕, 돼지고기.
*커버 이미지 : Jacob van Hulsdonck 'Still Life with Meat, Fish, Vegetables and Fru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