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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Aug 05. 2021

처음 본 이웃에게 예상 못한 위로를 받다

이웃과 처음으로 말을 해보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이사 박스에 담아온 옷을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할 거라고 예상 못했다. 일단 헹거가 있긴 해야 하므로, 이케아에서 사이즈에 맞는 헹거를 하나 골라서 몇 달 동안 잘 사용했다. 다만 집을 계속 임시방편의 느낌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사는데 지장 없지만, 좀 더 효율적이고 조금이라도 예쁘게 집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났다. 굉장히 귀찮은 일이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집을 임시거처가 아니라 애착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졌다. 내 삶에 내가 투자하고 있다는 느낌을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에 집중하는 거니까.


차근차근 가구를 새로 주문하기로 하고, 그중 헹거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받자마자 이전에 받던 헹거를 치우고 새로 온 헹거를 설치했다. 설치하고 나니 이전에 사용한, 깨끗하게 사용해서 새 것이나 다름없는 헹거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싶었다. 이전에 본가에서 헹거가 필요하다고 해서 동생에게 연락을 했는데, 아직 집 정리가 덜 되어서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전 동네에서만 사용해 본 당근마켓을 처음으로 활용해보기로 한다. 내게 당근마켓은 늘 빠른 처분이 목적이기에, 가격을 제법 낮춰서 헹거를 올려본다. 물건을 올리자마자 연락이 많이 오면 저렴하다는 이야기일 텐데, 하루 동안 연락이 없어서 조금 더 낮춰본다. 가격을 낮추고 몇 시간 뒤에 연락이 온다. 오후부터 연락을 해서, 밤에 헹거를 받으러 집 앞으로 오겠다는 확답을 받고 준비를 한다.


집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듣고 헹거를 들고나가본다. 완제품 수령을 원해서, 완제품을 조심스럽게 끌고 나간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 살고 있으므로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헹거가 높이와 폭이 있는 편이라 걸려서 안 내려간다. 계단을 지날 때 들어오는 센서등도 반응을 안 해서 꺼져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계단 한가운데에서 헹거가 낀 상태로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켜본다.


헹거와 함께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낑낑거리고 있을 때,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지나가야 하므로, 헹거를 들고 계단 위쪽으로 다시 올라가 본다. 올라오는 이에게 먼저 올라가면 된다고 말해본다.


"이리 내려와 보세요. 도와드릴게요".


같은 건물에 살지만 서로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말을 섞어보는 건 처음이다. 남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 헹거를 들고 내려가 보는데 여전히 빠져나가는 게 요원해 보인다. 민폐 끼치는 기분이 들어서 먼저 올려가셔도 된다고 하지만 이웃 남자는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같이 한번 해보죠".


계단 위에서 헹거를 어떻게 할지 둘이 고민하다가, 헹거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걸 떠올려본다. 헹거의 높이가 낮춰지고, 싱겁게 문제가 해결된다. 얼른 들고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시야가 좁아져서, 기본적인 부분을 놓쳤다.


"쉽게 해결되네요".


남자는 제법 땀을 흘리고 있고, 술 냄새도 난다. 어쩌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데, 취기가 올랐기에 도와준 게 아니었을까.


"그럼 조심해서 들고 가세요".


남자는 1층까지 내가 들고 가는 걸 봐주더니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근마켓 구매자에게 헹거를 넘겨준다.


이 동네에 와서 당근마켓으로 물건을 파는데 처음으로 성공했지만 예상했던 일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이웃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더 크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건물의 월세와 전세를 생각하면 대부분은 내 또래일 확률이 높고, 실제로 마주치는 이들은 대부분 그렇다. 오늘 만난 이웃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는 비슷한 또래이기에 알고 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사람들끼리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않으면 굉장히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막상 친해진다고 하더라도 멀어졌을 때 한 건물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달갑지 않은 일이니까.


개인주의가 당연한 이 건물 안에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아마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없지 않을까 싶었고, 오늘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말을 걸어준 그 남자가 몇 층 몇 호에 사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누군가의 친구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건물에서 주인집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이웃과 말을 해보았다. 이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 건물 안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


며칠 동안 집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헹거가 사라졌다. 잘 쓰던 헹거가 대체품이 생긴 이후로는 번거로운 물건이 되었다. 헹거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취기 가득한 남자가 호의를 베풀어서 헹거를 내려주는 일을 도와주고, 막상 굉장히 싱겁게 일이 해결되는 광경. 따뜻함을 필요로 하기에는 무척이나 덥고 습한 날씨이지만, 날씨와 달리 내 마음은 조금 차가웠었는지 그 호의가 따뜻하게 느껴지고 기분이 좋았다.


최근에 속상한 일이 있어서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당근마켓에 물건을 판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늘 느끼지만 위로는 예상 못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전에 연인과 헤어진 이후에 공강 시간에 도서관에서 재밌어 보이는 책을 찾다가 이지민 작가의 단편소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를 읽고 위로받았던 기억이 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왜 위로를 받았는지, 그 알고리즘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오늘 내가 이웃과 나눈 대화, 해프닝과 같은 이 상황 덕분에 며칠 만에 가장 크게 웃었다. 막상 이웃 남자 앞에서는 별 말없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웃음이 터졌다. 헹거 높낮이도 제대로 조절 못해서 낑낑 대고 있는 내 모습이나, 술에 취한 채 그걸 도와주려고 하는데 막상 도울 것도 없어서 어색한 상황.


다음에도 마주칠 일이 있을까. 마주친다면 당장 집 냉장고에서 꺼내 줄 건 제로콜라와 아몬드브리즈 뿐이지만 무엇이든 주면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당신 덕분에 나는 꽤나 많이 웃었고, 예상 못하게 위로받았다고. 남자는 아마 어리둥절하겠지만, 그의 얼굴을 희미해질지 몰라도 이 위로는 제법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그와 헹거를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들.



*커버 이미지 : Paul Klee 'Angel Applic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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