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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흐린 하늘 어디쯤에 제지공장 있는 것일까
윙윙 추위가 베어링을 돌리며 뽑아낸 흰 종이들이
바닥과 능선을 가리지 않고 겹겹이 쌓여있다.
이른 꽃눈을 덮고 있는 나뭇가지들과
시린 발자국들을 필사해 내는 순백의 지면에
폴짝폴짝 총총총,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온갖 날개와 꼬리들이
찍고 누른 간서刊書는 흘림체기법이어서
읽기도 전에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 속으로
둘둘 말려들어가기도 한다.
이제서야 알게 된 내 발밑의 무늬,
천지간의 육필肉筆이 선명하다.
하룻밤 새 흑과 백의 대립이
바뀌어버린 세상,
해가 떠오르면 곧 녹아내릴 것들이지만
공중과 바닥, 그 사이가
속 시원한 한 장의 판결문같이 청명하다.
지붕도 살얼음 숨어있는 저수지도 달리는 버스도
모든 기록은 빙점氷點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