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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Sep 27. 2018

부정적 감정은 중독성이 강하다

어둠에 중독된 사람들

어렸을 적, 잡기에 능한 친구가 내 손금을 봐주겠노라고 말하며 내 손을 쥐었다. 


"음... 잔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네. 고민을 많이 하는데, 대부분이 쓸데없는 고민이야.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걱정하지? 그런데 결국은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이럴 땐 그냥 내려놔야 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결정을 못하고 행동을 미루게 되거든."


네 손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가득 난 잔금이 네 고민의 흔적이야,라고 말하며 친구는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뱃속에 가시가 담긴 듯 콕콕 찔러온다.


[프라하, 체코]


누구나 그렇듯이, 사춘기 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크게 받아들였다. 두 눈에는 매크로 렌즈가 달려있었고, 두 귀에는 확성기가 대롱거렸다. 어머니가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라고 하시면 내 두 귀는 "제 때 일어나지도 못하는 패배자 같으니라고. 게을러터져서 어디 살겠어? 그러니까 니 성적이 그 모양이지."라고 듣는 정도였던 것 같다. 폭발하는 호르몬의 신비는 어디까지일까.


이쯤 되면 지랄 맞은 발광이라도 한 번 할 법 한데, 다행히도 나는 겁이 많았다. 이랬다가 잘못돼서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아니, 만약 저렇게 되면 그건 또 어떡하지, 하면서 끊임없이 SF 판타지 울트라 슈퍼 노벨을 써 내려갔다. 수북이 쌓인 원고 더미는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되어 내 머리 위에서 출렁거렸고, 나는 행여나 엎어질세라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 채 사춘기를 마감했다.


[프라하, 체코]


신중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 되었다


"크게 속 썩이지 않고 커줘서 참 고마워."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선뜻 미소 지을 수 없었다. 손바닥을 수놓은 수많은 잔금이 나를 옭아매고 있음을 깨달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중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에 못지않게 소심하다는 뒷말도 적지 않았음을 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한 번씩은 발작하는 그 시기를 무난하게 넘길 수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단순히 행동과 결정에 장애가 있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은 것이다.


[인사동, 대한민국 서울]


이런 일이 있었다. 


대학 새내기 시절, 학교에 Dual-Degree 제도가 생겼다. 본교에서 2년, 그리고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의 대학에서 2년을 보내면 양측에서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언젠가 꼭 해외에 나가서 생활해보고 싶었던 나는 입학과 함께 생긴 이 제도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큰 맘먹고 1학년 여름방학에 Dual-Degree 지망생들이 들어야 하는 계절학기 과목을 등록했다. 자매학교에서 직접 파견 온 교수님 두 분이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을 통과하고, 상대 학교가 요구하는 필수 교양과목들을 이수하면 자격요건이 주어진다. 뼛속까지 어문계열 문과생이었던 나는 계절학기가 중간쯤에 접어들었을 무렵 필수 교양과목 리스트를 들여다보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통계, 역사, 철학, 물리학은 물론 법학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범위의 커리큘럼.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역시 나의 사고 시스템은 슈퍼 울트라 SF 판타지 소설을 써 나가기 시작한다. 계절학기를 과목들을 통과해도 여기 적혀있는 모든 과목에서 일정 학점 이상을 취득하지 못하면 과정에서 탈락된다. 자칫 잘못하면 들어야 하는 전공과목을 듣지 못해 이중 졸업장은커녕 졸업유예 5학년생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운이 좋아 모두 다 통과하고 미국에 갔다고 치자. 미국 대학에서도 이런 다양한 커리큘럼이 주어지면 어떻게 하지? 영어가 부족한 내가 한 번에 모든 과목을 통과하고 제 때 졸업할 수는 있을까? 미국에 넘어가서 학점 부족으로 차일피일 졸업이 늦어지면서 비싼 학비만 낭비하다가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나면, 지금 대학은 멀쩡하게 졸업할 수나 있는 걸까..?


계절학기가 끝나고 성적표에는 두 과목 모두 A가 찍혀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후 취득해야 할 필수 교양과목을 모두 포기하고 전공에 전념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코스에서 이탈했고,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 쓸데없는 계절학기를 들은 것이 되었지만, 미국에서 낭비하게 될 어마어마한 돈에 비해 계절학기 몇십 만원 정도는 싸게 먹힌 셈이라고 생각했다.


[University of Washington, 미국 워싱턴주]


그리고 4년이 흐른 어느 봄, 나는 미국에서 대학 정규과정 수업을 듣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남들 다 가보는 어학연수를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학원에서 채 한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어학원 과정을 환불했다. 생각보다 수업이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 길로 근처 Community College 입학시험을 치렀고, 어렵지 않게 합격하여 정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새내기 시절의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겁냈던 것이라고. 그 미래가 너무 두려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 미래를 내가 스스로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나는 아마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그 구덩이에 넣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됨에 안심하며 하나 둘 실패하는 법을 몸과 마음에 새겨 넣었던 것은 아닐까.


[포로로마노, 이탈리아 로마]


부정적 감정은 중독성이 강하다


이런 생각이 든다.


부정적 감정은 중독성이 강하다고. 두려움, 좌절, 실패와 같은 어두운 것들은 습관처럼 새겨져 관성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정신은 균형을 원한다. 예측 가능한 미래, 변수의 제거. 그래서 가장 가기 싫은 곳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안심하고 만다. 이미 벌어진 일은 나를 헤치지 못하니까. 벌어지는 순간 두려워할 것이 사라지므로.


어둠에 중독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회사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친척들 틈에서, 모르는 사이에 이끼처럼 그 사람을 덮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는 삶을 좀먹어간다. 구더기가 썩은 살을 파먹어가듯이.


어둠은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 물면, 좀처럼 놔주질 않는다. 다른 방법은 없다. 스스로 깨고 나오는 것.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주둥이를 내밀어 삐약, 하고 허공에 미약한 소리를 내지르듯이, 늪에 빠진 두 발을 힘차게 차고 나와 쉰소리로라도 질러내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긍정적인 것들도, 밝은 것들도, 어두운 것만큼이나 중독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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