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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04. 2018

고슴도치 대화법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

고등학교 시절, 운동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었을 때였다. 몇 번의 대련을 지켜보던 사부님이 말씀하셨다.


"넌 타고난 성품이 날카로워. 아주 뿌리부터 다 갈아엎어야겠어."


나는 독설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말을 굉장히 빨리 익혔다고 한다. 보통의 아이들이 단어 두어 개를 조합해 어설픈 문장을 만드는 단계를 건너뛰고, 나는 단어를 익히기 무섭게 완성된 문장을 사용했으며, 존댓말과 반말도 곧잘 구분해서 사용하곤 했다고. 그래서 어디 가면 보통 내 나이보다 두세 살은 더 높게 생각했다고.


"말이 아주 그냥 청산유수였지. 외할머니는 네가 떠드는 걸 보다가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요 녀석은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뜰 거라고."


[루체른 호수, 스위스]


말을 빨리 익힌 만큼, 나는 욕도 빨리 익혔다. 그리고 내 또래의 아이들이 욕을 익힐 무렵에는 욕을 사용하지 않고도 제법 등골 서늘한 은유적 표현도 구사할 줄 알게 되었다. 운동신경이 둔해 싸움을 못하는 대신 입만 동동 띄웠던 것이다. 나의 살벌한 입담은 늘 상대의 인내심 경계 근처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임자를 만났다. 선천적으로 약한 체력과 운동신경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친구가 다니는 무술 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사부님을 만났다. 중국 무술의 숨은 강자였던 사부님은 상대방의 천성을 꿰뚫어 보는 매서운 분이었고, 나의 날카로운 성미를 고치겠다며 정말 혹독한 훈련을 꾸준히 시키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2단을 취득할 때쯤이 되었을 때, 나의 상대를 수시로 푹푹 찌르는 말버릇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아예 말수 자체가 줄어들었다. 묵직해진 것이다. 몇 년 간의 단련으로, 나는 물에 빠지면 입도 같이 가라앉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용머리해안, 대한민국 제주도]


역설적이게도,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어떻게 상처를 줘야 아픈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그리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그게 어떻게 상처가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늘 상처를 주던 입장에 있던 나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가슴에 대못을 박는 선임을 만나고 나서야 내가 했던 막말이 얼마나 독성이 강했는지를 깨달았다. 그 후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무서워했고, 단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말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곱씹는 버릇이 생겼다. 피를 흘려보니 남의 피도 무서워진 것이다.


군대를 제대한 이후로 나는 고슴도치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진상 손님에서부터 직장 상사, 거래처, 그리고 인터넷에서 만난 어느 이름 모를 네티즌까지. 모두들 혀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 더 날카로운 것, 더 뾰족한 것, 더 날이 잘 드는 것을 골라 상대의 폐부를 푹, 하고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런 말에, 나는 더 이상 아픈 말로 대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은 이후로 내 마음은 쉽사리 상처받지 않았다. 풍선처럼 위태롭게 부풀어 오르던 그 감정이, 강철로 된 무지개가 된 것 마냥.


말은 상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거리를 걷기만 해도, 우리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을 쉽게 듣게 된다. 네가 뭔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그럼 그렇지. 허공을 울리는 음파는 상대의 귀를 파고들어가, 마음에 콕하고 가시처럼 박힌다. 고슴도치가 지뢰처럼 곳곳에 숨어있다. 생판 남들도 귀에 이런 말을 들이는 순간 표정을 일그러뜨리게 되는 그런 말, 말들.


말은 상대와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소통이란 마음을 모아 함께 나누는 공감의 시작이 된다.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날아가는 말은, 뒤이은 상대에 의해 내 가슴을 찌르는 가시가 된다. 콕, 콕, 너와 나는 서로 상처를 나누지만 그 어떤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완전히 실패한 소통. 그런 대화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올림픽공원, 대한민국 서울]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 이유 없이 혀로 칼을 갈지는 않는다. 상대가 나를 찌를 것이라는 생각, 혹은 상대가 나를 이미 찔렀다고 생각할 때, 나도 혀끝에 독을 섞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내가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상대의 의도는 다른 것에 있지는 않을까? 정말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상대의 목적인 걸까? 아니, 설령 그렇다 한들, 내가 상대를 아프게 하는 것은 정말 정당한 일일까...?


성인군자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득도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상대의 말에 마음이 동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주먹을 쥐고 벽을 향해 힘껏 날려보자. 벽은 쿵하고 울릴 테지만, 그 충격은 내 주먹과 손목, 어깨까지 고스란히 남는다. 상대의 가시는 나를 찌름과 동시에 본인의 가슴도 함께 찌르게 마련이다. 나까지 그 상처뿐인 영광의 전쟁에 뛰어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히려 상대를 보듬고 크게 안아내는 것이,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내 호수처럼 평화로운 마음을, 고작 작은 가시 하나로 토네이도가 휩쓰는 오하이오 해변처럼 만들 필요는 없는 거라고.


[어린이대공원, 대한민국 서울]


여전히 가끔, 나도 모르게 욱 하고 상대를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스스로 이렇게 묻곤 한다. 무엇이 나를 그다지도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혹시 그 분노가, 아주 작은 오해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는지. 혹시 그 분노가, 조금은 다듬어진 혀끝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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