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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Sep 20. 2018

'실패'는 다시 시작하기 위한 통과점이다

실패라는 이름의 휴식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마치 건조기에서 갓 나온 빨래처럼 구겨져, 퇴근길의 발자국마다 머릿속에서 '바삭' 하고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유는 달랐지만 아내 또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써 미소 짓는 아내의 눈동자는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보는 듯했다.


[건국대학교 일감호, 대한민국 서울]


우리는 지쳐있었다


우리는 지쳐있었다. 따로 웨딩플래너를 두지 않았고, 결혼 또한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하겠다고 선언한 탓에 모든 결혼식과 신접살림 준비가 오롯이 우리의 몫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결혼을 한 달가량 앞두었을 때, 회사로부터 주말을 포함한 25일간의 지방 출장 지시를 받았다. 이렇듯 우리의 결혼 준비는 순탄치 못했다. 계절은 봄인데,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 복판인 것만 같았다.


[프라하, 체코]


일과 결혼 준비를 함께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정신적인 피폐함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아이디어로 시작해 완성된 프로젝트를 '승진 대상자 선배'를 위해 포기해야 했고, 나는 야심 차게 준비했던 기획안이 단칼에 날아가버렸다. 몇 달 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지난 수개월이 제로가 되는 마법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다가올 신혼여행만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냈다.


[란다 기라바루, 몰디브]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신혼여행을 맞이했다. 4박 6일의 몰디브 휴양. 햇살이 부서지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영롱한 산호에 취해, 우리는 모든 것을 잊었다.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는 안부전화 이후에는 핸드폰도 꺼두었다.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꿈의 세계로 빠져들기까지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처럼, 우리는 이 기묘한 환상을 몸 깊숙이 빨아들였다.


[란다 기라바루, 몰디브]
우리는 떠나기 전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때의 휴식은 참으로 꿀맛 같았다. 공기는 티 없이 맑았고, 바다에서는 칵테일 향이 날 것만 같았다. 현실을 잊은 신혼여행은 어린날의 꿈처럼 달콤했고 해변의 햇살보다 짜릿했다.


하지만 인천 공항에 발을 디딘 순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현실로 돌아왔다.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현기증이 조금 뒤따랐을 뿐 우리는 능숙하게 집으로 돌아왔고,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갔다. 일상으로 다시 녹아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떠나기 전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모든 것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더 이상 그 일들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란다 기라바루, 몰디브]


"아주 제대로 쉬고 왔나 봐? 휴가 전이랑은 표정부터 다르네! 신혼이 좋긴 좋아~"


휴가 복귀 첫날에 들었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의 표정이 좋아진 것이 신혼이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답은 단순한 것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일주일의 신혼여행 동안, 나는 모든 것을 비우고 '0'이 되었다. 나를 옭아매던 실패가, 이루었으면 얻게 되었을 보상에 대한 아쉬움이 더 이상 내 안에 남아있지 않음을 느꼈다.


나는 다시 어디로든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만큼, 내가 새롭게 택할 수 있는 길은 무한히 열려있음을 깨달았다.


['나나' 네살 적에 , 대한민국 서울]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르는 아픈 기억.


7년 전,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때의 일이다.


부끄럽지만, 이때의 나는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연애에 '실패'한 것이다. 몇 번의 헤어짐을 거쳤던 터라, 이번에는 꼭 예쁘게 오래 만나겠다 다짐했던 연애였는데.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나는, 카메라를 들고 억새풀이 예쁘다는 하늘공원을 향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셔터를 눌렀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가져갔던 배터리 두 개를 소진하고 메모리카드 세 개를 모두 채울 때까지.


[하늘공원, 대한민국 서울]


장면을 포착하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다. 찰칵. 일련의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찰칵. 찰칵. 찰칵. 팔이 저려오고 다리가 무거워져 간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메아리처럼 셔터음이 무한반복으로 울리고 있다.


[찰칵]

나는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찰칵]

이렇게 했더라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찰칵]

우리가 보낸 시간은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찰칵, 찰칵, 찰칵]

나는, 결국 여전히 많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해가 저물어 갈 때쯤, 두 번째 배터리의 마지막 칸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못해먹겠소,라고 카메라가 말하는 것 같다. 다리도 무겁고, 이미 오른팔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벤치에 걸터앉아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앞에는 억새풀 숲을 즐기러 온 한 가족이 나란히 서서 일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공원, 대한민국 서울]


'고마웠어'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미안해.'


행복하기를. 덕분에 많이 배웠어,라고. 산울림처럼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나의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때 처음으로 나는 이별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번 연애가 실패했음을,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의 무게만큼 절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를 괴롭히던 묵직한 덩어리가 다소 가벼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아니면 나는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던 질문들은 오후의 마지막 햇살과 함께 어둠으로 사라졌고, 나는 다시 백지가 되었다. 어떤 것도 새롭게 써나 갈 수 있는, 새하얀 A4용지 한 장.


[대치동, 대한민국 서울]


돌이켜보면, 나는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혹은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을 얻지 못했을 때를 '실패'라 불렀다. 정성을 들이고, 시간을 쏟고, 마음을 담아 뭔가를 이루려다 무너져버린 결과물. 그에 따른 피로, 자책감, 상실감, 때로는 분노까지.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한 템포 제자리에 머무르며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내가 선 곳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릿속 오래된 상자를 열어, 겹겹이 싸인 먼지를 털고 케케묵은 질문들을 꺼내어 본다. 그리고 한동안 이 질문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시간의 흐름에 마음을 띄운다.


나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깨닫는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랬다. 한참 달릴 때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전속력을 낼 때는 가질 수 없는 사치를, 나는 실패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조각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 한 박자 자리에 머물고 나면, 조금 더 단단해진 다리로, 조금 더 멀리 달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어느 방향이던 관계없이.


실패 뒤에 남는 찌꺼기에 파묻혀 어디에도 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숨을 고르고 천천히 머릿속에 되뇌어본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실패는 이야기의 끝이 아닌, 가장 좋은 시작점이다. 늘 그래 왔듯이,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단지, 어디로 가야 할지 주변을 살피기 위해,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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