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출산을 위한 본격적인 지출이 시작되었다.
임신 29주가 되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아내는 늘어가는 주수에 맞게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아이 방을 만들기 위한 나의 서재 철거도 잘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대단히 힘들지는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을 뿐, 그마저도 새로운 기대 앞에서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이제는 텅 빈 서재를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나가야 한다. 아이를 위한 침대, 기저귀갈이대, 유모차, 물티슈와 기저귀를 수납할 수납함, 기저귀 전용 쓰레기통 같은 것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관심 가진 적 없던 그런 물건들이 이 방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 사실이 묘하게 낯설다. 내 삶이 정말 달라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서.
당근마켓은 예비 부모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당근을 최대한 활용해보려고 해요.”
아내가 말했다.
“신생아 용품은 쓰는 기간이 짧은데도 아기 프리미엄이 붙어 가격대가 꽤 높아요. 그러니 상태 좋은 중고를 잘 찾아서 활용하는 게 좋아요. 저렴하고 상태 좋은 물건들이 중고시장에 많으니까, 잘 건져서 쓰다가 다시 중고로 되팔면 많이 절약하고 아낄 수 있어요.”
아내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아껴서 나쁠 것 없지. 꼭 새걸로만 사야 하고 꼭 비싼 걸로 해야 좋은 부모가 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잘 아껴서 현명하게 물건을 구비하자고 우리 부부는 마음을 맞췄다.
곧 당근에 여러 키워드가 등록되었다. 아기침대, 유모차, 젖병소독기 등등. 우리가 제일 처음 건져 올린 물건은 아기 침대였다. 새 걸로 사면 50만 원은 족히 들었을 구성품들을 10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모두 구했다.
물품 운송은 내 담당이다. 퇴근길 동선이 이리저리 꼬여간다. 본부에서 아내의 명령이 내려온다. 오늘은 판교의 00 아파트 X동 앞에서 저녁 8시 20분에 접선한다. 받아야 할 물건은 침대. 부피가 크고 주차공간이 협소하니 빠른 거래가 생명이다. 미리 자동차 뒷좌석을 폴딩 하여 짐을 실을 공간을 확보하고 출발할 것을 권한다. 안전거래 후 본부로 귀환하라. 귀하의 행운을 빈다.
똑똑한 소비에 유튜브의 도움이 컸다.
유튜브로 아기 용품을 열심히 찾던 아내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아기용품 전문 매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매장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는 다양한 육아용품의 비교 리뷰가 올라왔다. 아내는 제품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매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내가 눈여겨보는 브랜드가 대거 입점해 있는 그 매장은 아내의 소중한 연차 사용도 감수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매장에 꼭 가봐야겠다고. 그리고 이 매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고. 아내는 연차를 쓰겠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다녀오려고요. 상당히 큰 매장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연차를 쓰기로 했어요. 주말에는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으니, 평일에 가서 여유 있게 보려고. 가격대를 보고 인터넷 최저가랑 중고가격이랑 같이 비교해 볼 거예요.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결정하려고.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가니까 당신은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돼요.”
일 열심히 하고, 퇴근길에 나 데리러 오면 돼요 꼬물이 아빠. 아내가 말한다. 놀이동산에 가는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내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내가 장모님, 처제와 함께 쇼핑을 간 날에는 하루 종일 카톡이 울리지 않았다. 하루에도 두어 번 정도는 꼭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오곤 했는데. 장모님과 처제가 아내를 잘 보살펴줄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직장 동료들과 저녁 회식자리에도 참석했다. 10시가 다 되어갈 즈음 처가에 들러 아내를 픽업했고, 그때서야 아내의 밀린 하루 일과를 들을 수 있었다.
출산 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어요.
“출산 가방에 필요한 물건을 거의 다 샀어요. 앞으로 당근으로 구하려고 하는 품목을 빼고,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사은품이나 선물로 주는 품목도 몇 가지 빼고, 최대한 줄여서 샀어요.”
그런데도 세상에, 50만 원이 넘게 들었어요. 아내가 말했다.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내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것처럼 신났던 아내가 지갑을 열면서 조금 위축된 듯했다.
“장모님이랑 처제는 어땠어요? 같이 많이 봤어요?”
나의 물음에 아내가 반색하며 말한다. 두 사람 다 되게 즐거워했어요. 물건들이 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감탄사로 가득 찼어요. 어머. 어머. 어머머머머머.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오자 거실에서 아내가 주섬주섬 커다란 비닐봉지를 풀어놓으며 나를 부른다.
“이리 와 봐요. 자, 이거 봐바. 그러니까 이게….”
출산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은 기대감과 설렘이 더 큰 듯하다. 뱃속의 아이가 커갈수록, 아내의 배가 부풀어 오를수록 오히려 내가 더 초조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저 큰 게 정말 나온다고? 이런 생각을 하며 아내에게 무섭지 않으냐 물어보지만, 아내는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 그 이상한 여자 선배 기억나죠? 괜히 자격지심에, 내가 먼저 대리 진급한다고 엄청 괴롭혔던 그 선임. 그 사람이 애 둘을 낳았잖아요.”
그 한심한 사람도 한 걸 내가 못할 리 없어요. 아니,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자신만만하게 웃는 아내는 아마도 군대에 갔으면 별 정도는 우습게 달지 않았을까. 당찬 아내의 말에 슬며시 아내의 품에 안기며 부푼 배에 손을 올려본다. 이따금 볼록볼록 움직이는 꼬물이. 포근한 아내의 품에, 곧 이 아이가 안기게 될 것이다. 세상 든든한 엄마다.
나는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출산 가방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정말 출산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이다.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고 꾸준히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나는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뭔가 분명 변하고 있는데, 아직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알려주려나?
처음 아내가 임신을 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나 아빠로서의 생활이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는 알게 될까. 지금의 내가 겪는 이 변화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엇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었는지. 나는 어디까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