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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Aug 17. 2024

나의 여름이 너에게로 갔다.

01. 홍콩에서 친구가 왔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은이는
타오를 듯 거친 햇살을 이불처럼 덮고 누웠다. 

빨갛게 익은 두 볼을 씰룩이며
손가락 끝에 걸린 알갱이를 톡, 톡
눌러 터뜨렸다. 손톱 가득 
보랏빛 여름이 물들고 나는
또 지나가는 계절을 기꺼운 마음으로
너의 조그만 손바닥 위로 올린다. 

톡. 톡. 방긋 웃는 
너의 미소 뒤로 
나의 여름이 진다




낯선 알람이 울린다. 평소 쓰던 카톡이 아닌 텔래그램 메시지. 홍콩에서 친구가 온단다. 바로 오늘. 아니, 벌써 한국이라고. 


중학생 시절 만났던 친구는 졸업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해외에서 남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는 프랑스에서, 대학은 영국에서. 국제학교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겨울에는 스위스의 알프스 능선을 따라 스키를 탔고 여름에는 비엔나의 밤공기에 실린 오케스트라에 젖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병역을 마치고 석사를 마친 그는 훌쩍 홍콩으로 건너갔다. 금융권에서 일을 하는 그에게는 홍콩에서 날아온 제안이, 그곳에서 그가 얻을 기회들이 꽤 달콤했던 모양이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그는 능력을 인정받고 팀장 자리에 오른다. 작년에는 전 세계 모든 직원들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적을 올렸다던 그는 이대로면 두 해가 가기 전에 VP도 노려볼만하다고 했다. 그의 삶은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평소와 달리 급하게 한국에 들어온
그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급하게 한국에 들어온 그를 만나는 건 평소와 달리 쉽지 않았다. 그가 머무는 호텔에 찾아가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다소 살이 빠졌고 걸음이 많이 느려져 있었으며, 통증으로 인해 내가 건네준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들지 못했다.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류머티즘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고 갖가지 검사를 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제 슬슬 은퇴 플랜을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그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금융업계의 짧은 근속기간은 악명 높다. 보상은 잘 차린 잔치상 부럽지 않게 푸짐하고, 이별은 한낮의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럽고 즉각적이며 불가역적이다.


“언제쯤 은퇴할 생각인데?” 


나의 물음에 그가 시린 웃음을 띤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봄. 막 벚꽃이 피고, 얼마 되지 않아 목련이 무겁게 그 봉우리를 활짝 펼치던 때였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온도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던 때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어느 봄은 참 길었다. 늦은 밤 라일락 향이 가득한 그 골목. 벤치에 내려앉던 달빛은 시간이 지나도록 저물 줄 몰랐다. 우리는 깊어가는 새벽과 함께 풀리지 않는 삶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결코 잠들 수 없었던 그 숱한 밤들. 어린 날의 우리가 또렷이 빛나는 별처럼, 그렇게,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있었다. 


...


그리고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가 왔다. 곧이어 뜨거운 태양이 온 세상을 바짝 달구었다. 웅덩이진 도로 위는 거대한 수조가 되어 지나는 모든 것의 숨을 막았다.


순식간에.


...


그리고 다시. 이른 아침 차분해진 대기가 계절을 알린다. 입추. 


가을이 온다. 


나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주일을 머물던 친구는 내일이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간다. 병원비로만 수백만 원의 돈을 썼다며, 그는 사려고 쟁여두었던 아이패드를 내년으로 미루겠다고 한다. 단톡방의 또 다른 친구가 말한다. 얼굴도 못 보고 보내서 미안하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네가 더 걱정이야. 넌 건강 잘 챙기고 있지?”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해. 건강 상하면 더 하고 싶어도 못해.”


누구나 알법한 유명 법무법인의 변호사로 일하는 친구는 쓰게 웃는다. 


“이번 생은 그냥 이렇게 일하다 가는 게 운명인가 싶다.”


나보다 먼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는 요령 없이 엉덩이로 공부하던 학창 시절과 마찬가지로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산다. 이렇게 살다 갈 운명인가 싶다. 그의 말은 이른 나이에 어머니와 아내, 두 자식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숙명에 대한 한탄인 것 같기도, 그 운명을 먼저 살아가셨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말인 것 같기도, 어쩌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반어적 반항 의지의 편린인 것 같기도 하고.


...


아침에 눈을 뜬 은이는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덜 뜬 눈으로 두 발을 굴러 춤을 춘다. 비틀대는 발놀림으로 노래를 재촉하고 덩실, 또 덩실 햇살 속에 춤을 춘다. 별 것 없는 여름 한 조각에 은이가 덩실, 파도에 실린 나뭇잎 배처럼 너울거린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친 햇살을 이불 삼아 덮고 
거실에 누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짙은 풀냄새가 난다. 나의 여름이 
너에게로 갔다. 
나의 가을은 평화로울 것이다. 

너의 여름은 어떨까. 
오늘 나의 숙제는 
너의 춤에 부칠 나의 
흥겨운 노랫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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