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설탕이 녹은 자리에 남는 것들

by 소하

나는 오랫동안 설탕을 만지던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생일과 고백과 화해를 위해 케이크를 굽고, 그 위에 작은 모양을 올리던 나날이 있었다. 말로는 다 전해지지 않던 마음들이 색과 형태가 되어 건너가던 시간. 레이스 앞치마를 두르고 서있던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나는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 안에서 한 장면을 골라 상징으로 옮겼다. 밝은 색을 얹고, 모서리를 다듬고, 완성된 케이크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기에, 나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달 그 락.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앉은 자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무언가를 대신 만들어 건네기보다, 그 사람이 이미 안고 온 것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말이 멈춘 자리, 표정이 조금 어긋나는 순간, 설명되지 않은 침묵이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븐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마음을 밖으로 꺼내 모양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모양을 만들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을 보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한 문장 안에도 서로 다른 감정이 겹쳐 있고, 한 선택 안에도 여러 이유가 숨어 있다. 짤주머니를 처음 잡아보는 손의 떨림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처음이 있고 낯섦이 있다.

나는 그 복잡함을 쉽게 정리하지 않아 보려 한다.


사람은 상황보다 태도를 선택하는 존재라고 한다. 바꿀 수 없는 일 앞에서도,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스스로 고른다. 그 선택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태도는 조용히 쌓인다. 케이크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메시지를 써 내려가는 손처럼, 보이지 않아도 정성은 그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화려한 장식에 더 눈길이 갔다.

지금은 그 장식이 놓이기까지의 시간, 차마 말로 표현이 어려운 부분까지 함께 보게 된다. 우리가 외면해 온 부분이 결국 우리를 완성하는 것 같다. 감추고 싶었던 마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도 결국 한 사람의 얼굴을 만든다. 불룩하게 구워진 빵을 식힘망 위에 올려두면, 그 안에서 서서히 김이 빠져나가면서 진짜 빵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이 책은 무언가를 더 보태려고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나온 시간 위에 덧칠하기보다, 그 시간이 남긴 자국을 따라가 보려는 기록이다. 설탕이 녹아 사라진 자리에도 결은 남는다. 나는 그 결을 오래 들여다보려 한다. 마치 베이킹 향기가 가게 안 구석구석 배어있는 것처럼, 사람의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 곳에 남아 오래도록 따뜻하게 흐른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전하지 않아보려고한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태도가 어떻게 빛을 얻는지,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려 한다.


오늘도 가게 문을 열 듯이. 달 그 락.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 나는 그렇게 오늘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추억하게 만들고,
진심을 담아 한 줄씩 아로새겨
그저 묵묵히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






¹ Frankl, V. E. (1946). Man’s search for meaning. Beacon Press.
→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도 ‘태도 선택의 자유’를 지닌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실존적 자유(existential freedom)라 설명하며, 의미는 외부 조건이 아니라 개인이 상황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² Jung, C. G. (1964). Man and his symbols. Doubleday.
→ 융은 인간의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로 설명하며, 특히 ‘그림자(shadow)’ 개념을 통해 개인이 인정하지 않거나 억압한 측면도 인격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림자를 통합하는 과정이 곧 심리적 성숙과 개성화(individuation)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