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고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예술심리치료에서 재료를 건낼 때, 나는 되도록 말을 아낀다. 이걸로 이걸 만들어보세요, 라고 안내하지 않는다. 그냥 탁자 위에 놓아둔다. 물감이든, 점토든, 색종이든. 그리고 기다린다. 무엇을 고르는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손이 먼저 가는지 눈이 먼저 가는지를. 재료 앞에서의 망설임은 그 사람의 내면이 만드는 가장 솔직한 지도다. 아직 말로 꺼내지 않은 것들이 손의 움직임으로 먼저 나타난다.
아홉 번째 세션.
나는 탁자 위에 흰 종이 한 장과 물감 다섯 가지를 꺼내 놓았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검정.
루이는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
"뭘 그리면 되는 거예요?"
"아무거나요. 혹은 아무것도 안 그려도 돼요."
"...그게 더 어렵네요."
루이는 오래 앉아서 물감을 들여다봤다. 고르는 것이 아니라, 살펴보는 것에 가까웠다. 빨강 뚜껑을 손끝으로 건드렸다가 내려놓았다. 파랑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노랑도. 초록도.
나는 그 손을 바라보면서 오래전 베이커리의 손님들이 떠올랐다. 케이크 쇼케이스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 사람들. 딸기를 집었다가 초콜릿을 집었다가 결국 옆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고른다. 어떤 사람들은 고르는 것 자체가 허락이 필요한 일처럼 여긴다.
루이는 후자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른다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지 않았던 사람.
그리고 루이는 검정을 들었다. 천천히. 붓에 물감을 묻히고, 종이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점 하나를 찍었다. 그게 전부였다. 붓을 내려놓고 뒤로 기대어 앉았다. 그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만들려다 멈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흔적이었다. 드넓은 흰 종이 안에, 내가 여기 있었다는 가장 작은 표시.
파 삭 (붓이 종이에 닿는 순간)
"이 점이 어디쯤 있는 것 같아요? 종이 안에서."
"...가운데요. 아마."
"아마?"
"정확하진 않아요."
"루이씨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도, 혹시 그렇게 느껴지나요?"
루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를 봤다. 그 작은 검정색 점을. 오랫동안. 침묵이 다른 종류였다. 방어하는 침묵이 아니라 닿은 침묵. 질문이 맞는 곳에 가닿았을 때 생기는 조용한 공명.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타인의 좌표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오래 살아온 사람. 아버지의 기분이 나침반이었고, 어머니의 표정이 날씨였고, 오빠의 방향이 도로였던 어린 시절. 자신의 방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좌표를 찾는 일을 낯설어한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연습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연습이 지금 시작되고 있었다. 흰 종이 위의 작은 검정색 점으로부터.
흰 종이 위에 검정색 점 하나.
작고, 조심스럽고, 그렇지만 거기 있다.
존재는 면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크기로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루이는 그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자기 손으로 종이 위에 써본 것이었다.
기록: 아홉 번째 세션
루이가 돌아간 뒤, 나는 그 종이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치우고 싶지 않았다. 베이커리에서 처음으로 혼자 케이크 위에 장미꽃 하나를 올렸던 날이 생각났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 손이 만든 것이라는 것이 유난히 선명했던 날. 루이의 검정색 점이 그런 것이었다. 작고 불완전하지만, 루이의 손이 만든 것. 루이의 존재가 세상에 남긴 첫 번째 자발적인 흔적. 어쩌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참고 문헌 · 04
⁶ Adler, A. (1927). Understanding human nature. Greenberg.
아들러는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이 반복될 때, 선택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물감 앞에서 루이가 오래 망설인 것은 고르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고르는 것이 괜찮다는 내적 허가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