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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린 산천어 Jul 25. 2023

예, 교통규범 지키기

마음은 꽃피우는 것, 예의는 갈고닦는 것

망우역 앞 (전국매일신문)

 도로교통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도로에서 일어나는 교통상의 모든 위험과 장해를 방지하고 제거하여 안전하고 원활한 교통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차체는 사람으로 치면 얼굴과 옷입니다. 교통규범은 행동거지의 사람됨과 같습니다. 예(禮)는 사람됨의 껍데기입니다. 사람다운 마음이 있더라도 얼굴이 없으면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고, 금수처럼 옷을 걸치지 않고 산들을 뛰어다니며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닌다면 사람과 금수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답게 대접받기 힘듭니다. 옷을 때와 상황에 맞게 입어 몸을 지키고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하지 않으면 사회에 어울려 살기 힘듭니다. 차체가 없으면 운전자를 눈, 비, 우박, 바람, 그리고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지 못합니다. 교통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다른 차와 함께 같은 도로에서 달릴 수 없습니다.


 인은 마음이며 예는 마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인이 안이면 예는 바깥, 인이 체면 예는 용, 인이 진정성이면 예는 몸짓, 인이 신앙심이면 예는 합장과 절입니다. 인과 예는 둘이되 하나입니다. 예라는 모습 속에 마음이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으면서도 예만 지키면 허례허식(飾,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밈), 속 빈 강정입니다. 예가 없으면 마음을 알맞게 전할 수 없습니다. 예 속에 인이 하나되고 마음이 모자라지 않아야 예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참 거짓되고 버릇없는 때입니다. 예가 예답지 않습니다. 인을 전하기 위한 모습이나 사회적 약속이 아니라 무서우리만큼 팍팍합니다. 예를 지키는 사람은 강압적이며 폭력적입니다. 쓸데없는 잔가지가 많아 따르는 사람도 힘듭니다. 예와 법의 차이는 강제력에 있습니다. 불법과 위법은 형벌로 다스리지만 무례는 모범을 보이고 가르침으로써 다스려야 합니다. 뭇사람은 아직도 봉건제, 군주제의 관습을 따릅니다. 사회가 이토록 바뀌었거늘 깡그리 무시하며 도덕의 예를 쓰러트리고 있습니다. 예가 사회와 동떨어지면 더 이상 예가 아니게 됩니다.


 예는 시대와 사람이 바뀌면 모습을 부드럽게 따라 바꿉니다. 결혼식에서는 한복이 아닌 양복과 웨딩드레스를 입고, 장례식에서는 삼베옷이 아닌 검은 정장을 입습니다. 예가 사라진 게 아니라 바뀐 겁니다. 알맹이가 바뀌지 않는다면 예는 바뀌어도 상관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예를 불편해한다면 사람이 아니라 그 예를 바꾸는 게 맞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가치와 예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입니다. 예의 알맹이는 상대를 높이고 배려하며 겸손을 표현하는 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인사는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예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예는 기준이며, 기준이 없다면 사회가 어지러워집니다. 사회의 예가 가가례(, 집마다 다른 예)가 되어버리면 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도 다른 뜻으로 전해져 오해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예를 아예 없애버리면 마음을 전할 길이 사라져 버립니다. 군자는 예를 아끼고, 따르며, 지킵니다. 옳은 마음에 맞는 옳은 모습과 잣대가 꼭 필요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는 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안연 1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안연이 인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욕구를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네. 하루라도 욕구를 이겨 예로 돌아가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으로 돌아갈 것이야. 인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말하였다. “그 실천 조목을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야 하네.” 안연이 말하였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이 말씀을 따라 실천하겠습니다.”


 모범운전자의 운전은 교통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군자의 도는 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는 별게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매너(manner, 일상생활에서의 예의와 절차)니다. 매너란 신사답게 행동하는 것, 버릇없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기분 나쁘게 빤히 쳐다보지 말 것이며, 배고파도 맨손으로 음식을 먹지 말 것이며, 화나도 남의 말을 끊지 말 것이며, 아무리 급해도 새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매너에 버릇을 들인다면 예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비(非) 매너 행동은 욕구가 버릇이 되면서부터 비롯됩니다. 먹고 자고 뒹굴고 싶은 알량한 욕구를 도덕의 본성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버릇은 오랫동안 자꾸 이어나가는 것입니다. 버릇을 끊기란 무척 힘들겠지만 하루라도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있다면 다음날부터는 예에 버릇을 들여 군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회의 예는 개인의 실천으로 지켜지고, 바뀝니다. 세상이 나를 뺀 모든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옹야 25, 안연 15,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文을 널리 배우고 禮로써 요약하여 행한다면, 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학이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이 여쭈었다.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지만 교만함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괜찮으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네.” “ ‘절단한 뒤에 다시 그것을 간 듯이 하며, 쪼은 뒤에 다시 그것을 간 듯이 한다.(옛날 시의 구절)’ 하였으니,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너와는 이제 시를 말할 만하구나! 이미 지나간 것을 말해주자, 앞으로 말해줄 것까지 아는구나!”


 알지 못하는 건 죄가 아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으로 비칩니다. 멋모르는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다 큰 어른이 한다면 어떨까요? 어린아이는 시끄럽게 뛰어다니거나, 난데없이 소리 지르며 울거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해도 부모가 욕먹을 뿐, "어리니까"하고 거진 그러려니 넘어갑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은 얄짤없습니다.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답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무슨 말이든 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예를 익힐 수는 있어도 날 때부터 예를 알고 태어나지 못합니다. 예는 널리, 많이 배워서 스스로의 도덕을 갈고닦아야 합니다. 사람의 덕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과 같아서 반드시 예를 배워야 합니다. 돌멩이를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 끊고, 자르고, 다듬고, 갈듯이 배운다면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그럴 수 없는' 날이 오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사람이라면 예를 배워야 합니다.




팔일 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예를 어떻게 행할 수 있겠으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악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팔일 4, 

林放 問禮之本 子曰 大哉 問 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임방이 예의 근본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장례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네.”

팔일 8, 

...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한 뒤에 한다는 뜻이네.” “예는 뒤겠군요.” “자하 네가 나를 일으키는구나! 이제 함께 시를 말할 만하구나!”

양화 11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 예 하지만, 어찌 옥과 비단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음악, 음악 하지만, 어찌 종과 북을 이르는 것이겠는가?”


 껍데기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합니다. 예의 알맹이는 인이며, 인의 껍데기는 예입니다. 사람이 번듯한 옷과 깔끔한 얼굴과 번드르르한 말솜씨를 지녀도 마음씀씀이가 더럽다면 옷과 외모, 말솜씨가 쓸모가 없습니다. 똥차 엔진에 메르세데츠, 롤스로이스, 페라리, 람보르기니, 부가티 등 갖가지 차체를 얹는다고 그 차가 명차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도 슬퍼해주지 않는 성대한 장례식보다, 고인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초라한 장례식이 의미 있습니다. 예는 맞춰 입는 옷과 장신구, 음악과 선물에 있지 않습니다. 


 그림에는 바탕이 있듯이 예에는 인의가 있습니다. 바탕이 없다면 그림이 휑합니다. 예에 인의가 없다면 빛나는 다이아몬드도 아름답지 않고, 웅장한 오케스트라도 듣기 간지럽습니다. 요즘 사람이 생각하는 예는 오로지 모습에만 집중해서 복잡한 순서와 항목 자체가 예라고 믿지만, 예는 오로지 마음에 있습니다.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라는 글자에 눈과 귀를 홀려서는 안 됩니다. 예 안에 있는 인의의 진정성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학이 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

유자가 말하였다. “예가 행해지는 것은 조화가 중요하니...

학이 13, 

有子曰 ... 恭近於禮 ...

유자가 말하였다. “... 공손함이 예에 맞으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

안연 8, 

8. ... 子貢曰 ...  質猶文也 虎豹之鞟(鞹) 猶犬羊之鞹

 ... 자공이 말하였다. “... 꾸밈이 질박함과 같으며 질박함이 꾸밈과 같으니, 만약 꾸밈을 버리고 질박함만 보존한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도 털을 제거하면 개나 양의 털 없는 가죽과 같을 것입니다.”

옹야 16,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 彬彬然後 君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면적인 질박함이 외면적인 문채를 이기면 촌스럽고, 외면적인 문채가 내면적인 질박함을 이기면 겉만 화려하니, 문채와 질박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이다.”


 말의 내용이 바르더라도 상스러운 낱말을 써서 말한다면 마땅히 듣기 싫어집니다. 어질고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더럽고 남사스러운 몰골과 차림새를 하고 있다면 뭇사람은 먼저 다가가지 못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군자가 아닙니다. 예는 뭇사람을 위한 것이어서 알맹이만큼이나 껍데기도 중요합니다. 수수한 것도 좋지만 껍데기가 금수에 가까울 정도여서는 안 되고, 꾸미는 것도 좋지만 알맹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껍데기와 알맹이가 어울려서 껍데기는 알맹이값을 하고, 알맹이는 껍데기에 걸맞아 모자라지 않습니다. 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울림이며, 껍데기와 알맹이 사이의 어울림입니다. 예에 조화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자한 3,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베로 면류관을 만드는 것이 본래의 예인데 지금은 그냥 실로 만드니, 검소하므로 나는 요즘 것을 따르겠다.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본래의 예인데 지금은 당 위에서 절하니, 교만하므로 나는 비록 시속과 어긋나더라도 당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따르겠다.”

선진 1, 

子曰 先進 於禮樂에 野人也 後進 於禮樂 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선배들은 예악을 함에 있어서 세련되지 못하다 하고, 후배들은 예악을 함에 있어서 세련되다고 평가하는데, 내가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배들을 따르겠다.”

팔일 17

子貢 欲去告朔之餼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이 제사에 양을 올리는 예를 없애려고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공아. 자네는 그 양을 아까워하는가? 나는 그 예를 아깝구나.”


 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뀝니다. 군자는 시대가 흘러도 바뀌지 않은 가치를 지키지만, 더 도덕에 맞는 모습이 있다면 받아들입니다. 군자는 진보좌파나 보수우파가 아니라 도덕파입니다. 교통규범도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자동차의 모습도 기술이 발전하면서 달라집니다. 예 또한 과거와 현재가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교통규범은 운전자보다 보행자를 먼저 생각합니다. 차체는 예쁜 디자인보다도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바뀌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예는 똑같지 않더라도 도덕을 따른다는 점만은 몇백 년, 몇천 년 뒤가 되더라도 한결같을 것입니다. 주나라 시절 봉건제를 따르던 공자의 도덕을 현대 민주주의를 따르는 우리가 똑같이 가질 수 있는 까닭은 분명 도덕의 가치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족과 백성이 있는 시대나 왕이 없고 국민만이 있는 시대의 예는 서로 다르겠지만, 군자는 언제나 도덕을 가지고 예로써 사람을 사랑합니다.




팔일 15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를 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 曰 是禮也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제사를 도우면서 모든 일을 물으시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누가 추 땅 사람의 아들(공자)이 예를 잘 안다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는구나!”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이다.”


 예를 안다면 매 순간 함부로 굴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빠짐없을 수 없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잘 안다는 듯이 뻔뻔하게 굴고, 내세우기 좋아하면 실례(失禮, 실수로 예를 벗어남)를 낳기 쉽습니다.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기 위해 예가 있거늘, 실례투성이면 예는 없느니만 못합니다. 예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바라도 다시 꼼꼼하게 봐야 합니다. 아는 체하다 실수하느니 한 번 더 물어보는 편이 낫습니다. 교통규범은 운전자가 조심히 운전할 수 있도록 하고, 차체는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있습니다. 교통규범을 뒤에 업고 비겁하게 다른 운전자를 배려하지 않는 난폭운전을 하며, 제멋대로 자동차의 외관을 화려하게 꾸며놓고 다른 운전자의 운전을 방해한다면 껍데기와 알맹이가 반대로 된(, 본말전도) 샘입니다.




이인 13,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와 양보로써 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으며, 예와 양보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예를 어디에 쓰겠는가?”

헌문 44

子曰 上好禮則民易使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을 부리기 쉽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의 세상, 덕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의 세상은 예로 돌아갑니다. 예의 바른 사람이 많은 나라, 예의 바른 사람이 많은 사회에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군자는 교통법규가 사라지고 교통규범만이 남아있는 도로를 꿈꿉니다. 운전자의 자잘한 실수에도 벌금딱지를 매기고, 면허를 정지시키기 시작하면 도로에 자동차가 남아나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먹을 걸 훔치는 생계형 범죄에 높은 벌금형을 내리고,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무기징역을 살게 하거나 사형시키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남아있겠습니까? 법은 예를 닮아야 합니다. 당장 우리 사회에 법을 없앤다면 온통 뒤죽박죽이 되겠지만, 법만을 귀하게 생각하고 예를 천하게 여긴다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고, 말을 똑바로 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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