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어려워도 교학은 쉽다
덕이 거닌 자취가 모이면 도라고 합니다. 도를 모아 알기 쉽고 따르기 좋은 지도처럼 만들면 교(敎)입니다.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기 위해 교를 배우면 학(學)입니다. 덕은 도를 낳고, 도는 교를 낳으며, 교는 학을 낳습니다. 덕뿐만이 아니라 도, 교, 학 또한 사람에게 갖춰져 있습니다.
덕은 선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방금 출고한 따끈따끈한 신차는 모든 부품과 장치가 갖춰져 있어 모자람 없어 보이지만, 연료가 떨어지면 주유소를 가야 합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운전하다 보면 여기저기 녹이 슬고 고장 나기 시작하면 카센터에 가야 합니다. 엔진오일과 냉각수를 채우고, 마모된 타이어를 갈거나 차체의 구겨짐을 펴고, 흠집을 덮어야 합니다. 덕의 부품인 사덕도 마찬가지여서 인의예는 고치고 지는 채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는다면 사람은 날이 갈수록 도와 멀어집니다. 깨끗한 덕은 세월에 의해 더럽혀지더라도, 교학으로써 다시 닦아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어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교학입니다. 갓난아이가 나이를 먹고 크면 몸이 늙을 뿐, 어른의 껍데기 속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이입니다. 갓난아이의 덕은 깨끗하지만 예지(禮智)를 모르기에 도에 나아가기 힘듭니다. 어진 마음으로 떼쓰고 의로움으로 억지 부린다면 버릇없고 어리석게 됩니다. 교학은 사람에게 나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고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만들어줍니다.
유교는 호학(好學, 배우기를 좋아하다)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가르치고 배우기 좋아합니다. 교학은 도덕과 함께 나에게 갖춰져 있기에 가깝습니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 등의 과목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귀고 맺어지는 것을 좋아하기에, 인간관계의 방법이며 실천인 교학도덕을 마땅히 좋아합니다. 이른바 '높으신 분들'은 과목을 잘 외우고 시험을 잘 쳐서 높은 자리에 올라 대접받겠지만, 진짜 대접받아야 할 사람은 교학과 가까운 군자입니다. 어진 사고, 의로운 태도, 예다운 언어를 가진 사람이야 말로 높으신 분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중용 1,
1.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준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르고, 도를 닦은 것을 교라 이른다.
양화 2,
2.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성품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하여 서로 달라지게 된다.”
사람의 본성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다만 도덕에 가깝게 배우면 군자가 되고, 욕구에 가깝게 배우면 소인이 됩니다. 도로에서 쌩쌩 달리는 자동차와 폐차장에서 나뒹구는 자동차가 어디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험하게 굴리고, 부품이 고장 나도 내버려 두고, 손을 놔버리면 나중에 폐차장으로 가게 됩니다. 자동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재깍재깍 고치며 아끼면 반영구적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같은 본성을 지녔음에도 어떻게 배우냐에 따라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폐차되기 직전의 자동차라도 다시 한번 도로 위를 달릴 기회가 있습니다. 한편, 이미 도로 위를 멀쩡히 달리고 있는 자동차라도 꼭 꾸준히 관리해야 합니다. 소인도 교학으로 군자가 될 수 있고, 군자도 교학을 놓으면 소인이 됩니다. 엉망진창으로 박살 난 자동차라도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원래대로 고칠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폐차하는 이유는 수리하기보다 새로 한대 장만하는 게 더 싸게 먹혀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도덕은 망가지면 어디에도 새로 살 곳이 없습니다. 배우면 윤이 나고 배우지 않으면 녹습니다. 사람에게는 오로지 교학뿐입니다.
학이 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배불리 먹기를 바라지 않으며, 편안히 거처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을 삼가며, 도가 있는 이를 찾아가서 바로잡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공야장 14,
子貢 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 謂之文也
자공이 여쭈었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이라고 시호 하였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빠르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네. 이 때문에 ‘문’이라 시호 한 것이네.”
공야장 27,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열 집쯤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주충신하는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옹야 2,
哀公 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哀公이 물었다. “제자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제자가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자장 5
子夏曰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자하가 말하였다. “날마다 모르는 것을 새로 알며, 달마다 이미 능한 것을 잊지 않으면, 배우기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
술이 2,
2. 子曰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묵묵히 마음속에 기억하며,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는가?”
술이 18
葉公 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葉公이 자로에게 공자의 인물됨을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는 어찌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 사람됨이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고, 알고 나면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버리며,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라고.”
자동차에게 마음이 있다면 분명 카센터와 주유소를 갔을 때 가장 기뻐할 겁니다. 몸을 닦고, 새 옷과 새신을 신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자동차에게 카센터가 있다면 덕에게는 교학이 있습니다. 어쩐지 뭇사람은 교학을 '공부'라고 말하며 싫어합니다. 공부와 교학이 다른데 둘을 하나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공부는 입시, 곧 과목을 배워 시험을 치는 수단입니다. 공부의 목적은 취업이나 취득에 있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라면 미적부, 기하학, 물리학, 화학은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공부는 수단이지만, 교학은 목적이기도 합니다. 교학은 수단과 목적 모두 도덕에 있습니다. 인을 배운다면 인이 목적이고, 의를 배운다면 의가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일과 사랑받는 일, 마땅한 일과 마땅히 하는 일이 모두 도덕입니다. 교학은 도덕을 배우는 일입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말을 깨끗하게 하며, 행동은 나날이 새롭게 합니다. 평생을 써먹고도 남습니다. 교학을 제대로 안다면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도덕은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꼭 배워야 합니다.
술이 21,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善한 것은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것은 거울로 삼아 고쳐야 한다.”
태백 5,
曾子曰 以能 問於不能 以多로 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 吾友嘗從事於斯矣
증자가 말하였다.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 적게 아는 이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하며, 남이 잘못을 범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옛날에 나의 벗 안연이 일찍이 이런 일을 실천했었다.”
자장 22
衛公孫朝 問於子貢曰 仲尼焉學? 子貢曰...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중니仲尼는 어디서 배웠소?” 자공이 말하였다. “... 선생님께서 어디에서인들 배우지 않으셨겠으며, 또한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으시겠습니까?”
도덕은 늘 곁에 있거늘, 교학을 멀리서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자동차야 전문지식이 없으니 카센터에 가야겠지만 도덕은 배우는데 꼭 스승이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군자는 어디에서나 배울 곳을 찾고 누구에게서나 배울 점을 찾습니다. 군자에게는 세상 모든 곳이 학교이며, 세상 모든 이가 스승입니다. 나보다 난 사람이 있으면 교사로 삼고,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으면 반면교사로 삼습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도 나보다 나은 점이 있을 수 있고, 나보다 난 사람에게도 닮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우지 못할 점이 없습니다.
계씨 9,
9. 孔子曰 生而知之者는 上也요 學而知之者는 次也요 困而學之 又其次也니 困而不學이면 民斯爲下矣니라
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어나면서 아는 [生而知之] 자가 최상最上이고, 배워서 아는 [學而知之] 자가 그다음이고,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배우는 [困而學之] 자가 또 그다음이니,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최하最下가 되는 것이다.”
중용 20,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알지만, 그 아는 데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서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지만, 그 공을 이루는 데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학이 7,
子夏曰 賢賢 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 이를 존경하되 女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서 하며, 父母를 섬기되 있는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자기 몸을 바치며, 벗과 사귀되 말을 하는 데 신의가 있으면,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고 하겠다.”
날 때부터 덕을 아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고, 된통 맞은 다음에야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편하게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고, 이롭게 느껴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고, 가까스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덕을 알아 가까스로 도를 따른다면 가장 좋겠지만, 된통 맞고 알게 되어 가까스로 따른다고 해서 군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덕을 알고 도를 따르는 게 중요하지 곁가지는 필요 없습니다. 날 때부터 덕을 알아 늙어서 까먹으나, 된통 맞은 다음에 알지 못하나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합니다.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배우지 않았어도 실천할 수 있다면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몰라도 예수처럼 살면 천국에 갈 것이고, 부처를 몰라도 부처처럼 산다면 해탈할 겁니다. 공자를 몰라도 공자처럼 살면 군자입니다. 어질고 의롭기에 군자인 것이지 논어를 읽었기에 군자인 게 아닙니다. 도덕이 없다면 공자와 논어도 아무개와 불쏘시개입니다. 운전면허시험을 만점 받은 사람이라도 장롱면허라면 운전면허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