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샘처럼, 끊김 없이 끈기 있게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에 마음을 쏟는 사람을 성실하다고 합니다. 성실은 본디 거짓 없다는 뜻입니다. 성실은 끈기와 뜻이 비슷하게 쓰입니다. 성실과 끈기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예컨대 매일 꾸준히 세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자동차를 아끼는데 거짓이 없을 겁니다. 보여주기식으로 한두 번씩 세차하며 자동차를 아끼는 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이든 거짓된 마음과 뜻으로는 꾸준히 해낼 수 없습니다.
거짓 없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도덕을 따른다면 성(誠)입니다. 성실(誠實), 정성(精誠), 충성(忠誠)입니다. 성이 없다면 도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이 한 번가고 한번 막히며 그다음 뜨문뜨문 어질었다 어질지 않았다 한다면 결코 어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의예지가 모두 그렇습니다. 인의예지와 불인, 불의, 무례, 무지는 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학의 성공과 실패는 성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으레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고 합니다. 그 공부와 이 공부는 뜻은 달라도 알맹이는 같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는 말은 지식의 넓고 깊음이 아니라 틀림없이 성의 더할 나위 없음을 말했습니다. 교학은 꾸준히 해야 이루어지고, 꾸준함은 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덕에 대한 거짓 없는 마음이 교학을 끊임없이 사람 곁으로 몰아줍니다.
하루 운전하고 몇 년씩 차고에 박아놓은 자동차보다 십 년을 꾸준히 운전한 자동차가 오히려 잔고장이 없습니다. 주유는 연료가 부족할 때마다 해야 합니다. 엔진오일과 냉각수를 보충하고 타이어를 교체하며, 도색을 다시 하는 등은 자동차가 폐차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거짓된 마음으로는 덕을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수 없기에 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군자는 스스로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속이지 않습니다. 군자의 덕이 남을 움직일 만큼 큰 까닭은 성이요, 세상을 바꿀 만큼 넓은 까닭도 성입니다. 성하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 없고, 군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용 26,
故 至誠 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그러므로 지극한 성誠은 쉼이 없으니, 쉬지 않으면 오래가고, 오래가면 징험이 나타난다.
자한 16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도다.”
성은 마음속 덕의 샘에서 나와 쉼 없이 도를 따라 흐르는 물길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한강과 같이 도덕은 끊기지 않습니다. 덕은 쉼 없이 닦고, 도는 쉼 없이 가야 합니다. 끝이 있을지언정 끊겨서는 안 됩니다. 성은 티끌만큼의 거짓도 섞여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꾸준합니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세차한 자동차는 보닛에 먼지가 앉을 겨를이 없습니다. 뭇 운전자는 늘 깨끗한 좌석에서 운전하고 싶어 하지만 매일 청소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성이 모자란 탓입니다. 사람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잠을 자는 이유는 살고 싶다는 마음에 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자는 성을 사랑하고 베풀며 의롭게 실천하는 성으로 바꿀 수 있다면, 덕을 지키고 도를 따르는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요?
중용 21, 중용 22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본성이라 이르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성해짐을 교라 이르니, 성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해진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한 분이라야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
중용 25
誠者 自成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 時措之宜也.
성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가야 할 길이다. 성은 사물의 처음과 끝이니, 성하지 않으면 사물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을 귀하게 여긴다. 성은 자신을 이룰 뿐만 아니라 남을 이루어주니, 자신을 이룸은 인이고 남을 이루어줌은 지이다. 이는 본성의 덕으로 안과 밖을 하나 되게 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자신에게서 얻으면 때에 맞게 실천하여 마땅히 얻게 될 것이다.
덕 안에 학, 교, 도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덕을 밝히려면 오로지 성밖에 없습니다. 밝히기 위해서는 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이 없으면 도의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인의 엔진을 가동하고, 의의 운전대를 잡으며, 예의 교통규범을 지키고, 지의 와이퍼와 상향등으로 앞을 밝혀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덕은 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성하게 교학으로써 덕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입니다. 내 차는 차주인 내가 운전해야지 내 차를 어디 남이 운전케 할까요? 덕은 택시요, 버스가 아닙니다. 덕에는 대리운전이 없습니다.
성으로 배우고, 배움으로써 성해져야 합니다. 성하게 배움으로써 덕을 키운다면, 배우는 제자에서 가르치는 스승이 됩니다. 스스로를 밝힐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남도 밝혀줄 수 있습니다. 내 안쪽과 바깥의 남을 성으로 밝혀 하나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 군자입니다. 남의 차를 대신 운전해 줄 수는 없지만 초보운전자의 보조석에 앉아 지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내가 배워서 가르치고, 내가 가르친 사람이 배워 다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연결고리가 쉼 없이 이어진다면 과연 세상에 덕을 모르고 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을 가리는 욕구의 그늘을 도덕의 빛으로 밝게 걷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용 23,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 爲能化.
성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뚜렷해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바뀌고, 바뀌면 피워낼 수(化) 있으니,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한 분이라야 피워낼 수(化) 있다.
맹자 이루상 41,
孟子曰 居下位而不獲於上 民不可得而治也 獲於上有道 不信於友 弗獲於上矣 信於友有道 事親弗悅 弗信於友矣 悅親有道 反身不誠 不悅於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其身矣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 방법이 있으니, 벗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벗에게 믿음을 얻는 데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를 섬겨 기쁘게 하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자신을 되돌아보아 성하지 못하면 ... 어버이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되돌아보아 성하게 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자신을 성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맹자 이루상 42
是故 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未有能動者也
그러므로 성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지극히 성하면서 남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있지 않으니, 성하지 못하면서 남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성으로 움직이게 하고, 움직이면 바뀝니다. 오직 성해야만 움직이게 하고 바꿀 수 있습니다. 성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동은 마음의 움직임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몸도 따라 움직입니다. 사람이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 마음이 찡하거나 심장이 끓어오르는듯한 감정을 느낀다면 덕이 있어서입니다. 나의 성으로 덕의 봇물을 터트려 흐르도록 한다면 남 또한 휩쓸려 쉼 없이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성은 도미노처럼 좌르륵 넘어지면서 퍼집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성 자체는 하늘이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덕은 태어나면서 갖기에 천부적입니다. 그러나 덕은 성해야 밝힐 수 있고, 밝히지 않으면 덕을 알 수 없습니다. 성이 덕 안에 있대도, 거짓 없이 배워워먄 꼭 덕을 밝힙니다. 세차장은 자동차를 세차시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막상 운전자가 와서 직접 세차하지 않는 한 세차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은 항과 비슷합니다. 항이 언제나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덕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면, 성은 거짓 없이 꾸준한 덕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합니다. 성하면 꾸준하고 거짓 없으면 쉬지 않으니 덕을 알면 '항상', '성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