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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Mar 01. 2024

퇴사를 선택하기까지

 난 늘 활기찰 거라 생각했다. 집에 있는 것보다 나가는 걸 좋아하고 누워서 유튜브 보는 것보다 새로운 취미를 갖는 걸 더 좋아하니까. 늘 무언가를 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요즘, 예전과 달리 체력이 많이 안 좋아졌음을 실감한다. 이미 다 먹어본 음식, 이미 다 가본 곳, 이미 다 해본 것. 대부분의 경험이 지루하고 귀찮게 느껴졌다. 밖에 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강렬한 경험이 아닌 이상 크게 흥미가 생기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고민해 봤다.



 회사에 가는 게 괴로웠다. 회사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회사가 마냥 싫은 건 아니다. 힘든 일 끝에 찾아온 성취감을 알기에 내게 일은 중요하다. 최근 들어 성취감 있는 일보다는 시켜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결과가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해야 하기에 조금씩 무기력함이 찾아온 듯했다. 좋은 것만 할 순 없다. 안다. 알지만 어느 정도 성취감은 느끼고 싶었다.


 '소비자'가 아닌 오너의 정해진 답을 따라야 할 때가 많았다. 모호한 기획, 갑자기 변하는 계획. 데이터 분석은 의미 없었다. 우리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찾을 방법도, 잘한 시도를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매출이 나오지 않았지만 팀장은 그 방법만 고집했다. 당연히 결과는 마이너스였고 업무의 과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지지했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같은 방법만 시도하는 걸 보고 힘이 빠졌다. 그런데도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타가 왔다. 괜찮은 오너와 팀장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회사를 다녀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직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고민할수록 시간은 흘렀고 일은 지루했지만 익숙해졌다.


 회사에 다닐 때마다 꼭 듣는 말이 있다. "열심히 사시는 것 같아요, 그 열정을 오래 유지해 주세요." 아니라고 겸손 떨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지금 회사에서는 이런 열정을 외면했다. 열심히 해 봐라고 말하지만 내 기획서는 눈여겨보지 않았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무시하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회사 직원 모두에게 이런 태도였다.


 그럼에도 속으로 '그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간'이라며 또 한번 열심히 했고 또다시 실망하고 말았다. 어느 순간 여기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매출이 생기지 않는 방법으로 마케팅하고 돈은 쓰지 않으며 성과가 없다고 말하는 이 환경이 이해되지 않았다. 설득하고 기획서를 제출하고 트렌드 리포트까지 만들었지만 상사는 웃고 넘겼다. 열심히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챘다. 이런 와중에 팀장이 내게 말했다. "네가 기획서 쓰고 있는 거 아무도 관심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여기에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내 시간을 버려가며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열심히 한 만큼 더 힘들었다. 다시 침대에서 일어날 에너지가 필요했다.



 20대의 '될 대로 돼라'와 30대의 '될 대로 돼라'의 의미가 많이 달랐다. 과감했던 때와 다르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안다. 조금만 움직여도 많은 체력 소모가 필요하여 그 체력을 아끼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냥 눈만 감으면 시간은 흐를 테고 또 이대로 적응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체력을 비축하기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성이 남아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직을 고민하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내 브랜드를 만들거나 블로그를 시작하거나 공방을 다니며 취미를 가지면서 말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라 피곤하진 않았다. 다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짧다고 느낄수록 '시간이 낭비된다는 것'에 스트레스받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서 얼굴에 트러블이 올라왔다. 팩을 하고 물을 많이 마셔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는데 어느새 트러블이 퍼지기 시작했다. 피부과에서는 피부 탄력이 많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말했다. 뭔가 아찔했다. 이렇게 트러블이 생기면 며칠 뒤면 사라졌었는데, 그렇게 거울을 자세히 보니 얼굴에 주름도 많이 보였고 앞머리엔 흰머리도 많았다. 내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이렇게 인상 쓰면서 보내는 게 맞을까? 이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 나는 늘 후회하는 일만 남을 것 같았다. 결국 여기를 떠나기로 했다. 시키는 일만 하면서 편하게 지낼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더라고 성취감 있는 일을 할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많은 체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 체력을 뛰어넘을 만큼, 나에겐 성취감이 중요했다. 다시 이력서를 쓰고 면접 보고 회사에 적응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벌써 지친다. 다만, 여기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훨씬 의미 있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근무 외 시간을 잘 보내면 되겠지만, 역시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는 만큼 회사에서도 잘 보내고 싶은 게 결론이다.


 가끔 내가 나를 고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어쩌겠어. 이게 나니까 받아들이면서 잘 살아봐야지. 고단하긴 해도 그 고단함을 잊을 만큼 성취감이 좋다면 오히려 괜찮은 선택일지 모른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실행 못한 것들이 많았다. 다만 브랜드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방법론을 찾는데 재미를 느꼈다. 창의적인 일이 두려워서 피했지만, 어쩌면 난 이런 창의적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거 나라서 피했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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