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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몽블 Oct 24. 2016

엄마와 함께 하는 가을의 바삭함

1990년도 엄마의 일기에 2016년도 제 일기를 더한 글입니다. 엄마의 하루와 제 오늘이 담겼습니다.

1991.10.24. 목 맑음 엄마가 쓴 일기입니다.
: 이름 - 이슬

슬이는 혼자서 손을 허우적거리고 이불을 발로 차면서 20분 정도를 놀더니 하품을 했다.

졸리운가 보다. 엄마를 보면서 안아 달라고 잠투정을 한다.

이제 슬이는 이불을 덮어주면 발로 차고 옷소매를 입에 물고 빨면서 노는구나.

엄마가 딸랑이를 손에 쥐어주니 그것도 입에 가져가 빠는구나.


지금 슬이는 엄마 무릎에서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한다.

엄마가 시를 (이해인 님) 읽어주니 엄마를 똑바로 쳐다본다.

두 귀를 쫑긋 새우는 것 같기도 하다. (민들레의 영토)


슬이는 푹 자고 난 아침에 엄마가 슬이를 보면서 다리를 만져주며 노래를 불러주면 기쁜지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낸단다. 엄마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가 보다고 엄마는 생각한단다.


연신 입을 벌려 웃는 네 모습 너무나 예쁘다.

그렇게 한 20,30분을 노래 부르고 나면 엄마 목도 아프고 슬이도 싫증이 나는 것 같아 엄마는 슬이를 안아준단다.


슬이는 엄마 품에서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벌리고 오물오물거린다. 배냇짓을 한다.

입을 벌려 웃기도 하고 양 미간을 찡그리며 아픈 표정도 짓고 무엇이 슬픈지 흐느끼기도 한다.


이젠 엄마품에 안긴 슬이가 제법 무겁다.

슬이 속눈썹이 처음에는 작고 촉촉하게 젖어 잘 보이지 않더니 두 눈 감은 것을 보니 많이 자랐구나.

아빠 속눈썹을 닮아 길고 예뻤으면 한다.



2016.10.24 월요일 날씨 바람이 불지만 맑은 날.


백수 생활을 하면서 좋은 점은 시간적 여유가 많아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백수생활을 하면서 브런치에 글을 못 올리고 있다. 어찌나 뭉그적+게으름이 심한지 내가 나에게 놀랄 지경.)


요즘 책을 읽을 때면 따로 찾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서 책을 읽으면 내가 꼭 신선이 된 것 같아 풍류를 한껏 즐기며 풍경과 여유를 누린다. (누려~)


정자 외부사진
정자 내부에서 밖 풍경사진

8월에는 지긋지긋한 폭염이 기승을 부려 괴롭게 했는데 이제는 제법 선선하다 못해 스산한 느낌이다. 이 정자를 가는 길에 나는 가을이 완연하게 다가왔음을 느낀다.


정자를 가는 길은 해가 뜨겁지 않은 시간에 집을 나와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짧은 다리를 건너, 바닥이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지나, 보라색 흰색 도라지 꽃밭을 넘어, 벚꽃나무가 양옆으로 가득한 길을 쭈욱- 걷다 보면 내가 책을 읽는 정자가 나온다.


봄에는 핑크 빛 연한 벚꽃들이 흩날리고 여름에는 푸르고 파란 싱그러운 잎을 보다가 이젠 바닥에 떨어진 낙엽 잎을 보니 가을이 왔구나, 했다.

정자 가는길 벚꽃나무 길

정자에 가는 길 늘어진 벚꽃나무 길을 걸을 때 나는 퍽- 즐겁다. 바닥에 흩뿌려진 총 천연 갈색 잎을 밟으면 아침에 가끔 먹는 씨리얼처럼 바삭거린다. 그 바삭 바스락 소리가 흥겨워 이리저리 밟으며 걸으면 길었던 10분이 금방 간다.


책 한 권, 물한병 달랑 들고 정자에 도착하면 오자마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보다가 책을 읽고 또 졸음이 오면 잠을 자는 그야말로 이곳은 무릉도원, 유토피아가 따로 없고 나의 마음은 유유자적, 물아일체가 되어 한껏 다가온 가을의 바삭함을 온몸으로 느낀다.

보통 이상태ㅋㅋㅋㅋ(유유자적, 물아일체)


오늘은 엄마와 함께 정자를 찾아왔다. 짧은 다리를 건너 양쪽으로 늘어선 벚꽃나무를 지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메뚜기를 보고, 벼베기가 한창 진행 중인 논을 보면서 그 길을 걸었다.


정자에 도착하니 엄마가 석양, 김인배 씨의 노래를 틀었다. 알록달록 고추장을 한껏 온몸에 바른 나뭇잎을 정자에 누워 바라봤다. 시를 들려줄 테니 제목을 맞춰보라고 하고는 엄마에게 석양 노래에 맞춰 시를 읽어드렸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 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서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란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시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민들레의 영토, 이해인


1991년 오늘 엄마가 나에게 읽어 줬던 시를

2016년 오늘 내가 엄마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완연하게 내게 다가온 가을은 내 마음을 바삭 바스락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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