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썸머]([500] Days Of Summer,2009)
나에서 비롯된 사정과 사건
사랑은 나로부터 비롯된 사건이다. 사랑의 시간은 어느 때보다 나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 앞에서 웃음 짓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떠한 일에도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며, 질투에 몸을 떠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그대를 보고 싶어 상사병에 걸린 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나는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은 사라진다.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좁은 나로 수축한다. 실연이 아픈 것은 너무나 컸던 나를 둘러싼 사건이 사소한 사정이 되어버린 상실감 때문이다.
사소한 사정이 되어버린 나의 사랑. 이제부터 다른 사람을 통해 이야기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다 겪어본 일’이라는 보편적인 구조 아래로 포섭되며 해부될 수 있다. 영화 <500일의 썸머>가 시작할 때 주인공 톰의 사랑은 이미 사정이다. 영화는 톰의 사랑을 되짚는다. 사랑이 발생하고 소멸되는 메커니즘 아래에서 톰의 사랑은 분석되고, 논증된다.
"네가 더 나빠"
사랑이 이별 후 사건에서 사정으로 축소되었다고 해도 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을 되짚어 볼 때, 필연적으로 주관은 개입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석과 논증이 가능해진 사랑 앞에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명확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실수를 더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려 한다. 친숙한 논리의 형식인 재판을 끌어오는 것이다. 사랑을 되짚어 보는 데 잘잘못을 가리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혹 그것을 가리려고 하더라도 ‘사랑을 하는 중’이었다는 특별한 맥락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를 잊고 지금의 잣대로 그때의 사랑을 재고 상대를 나쁜 X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이는 객관화를 가장한 낮은 수준의 주관화에 불과하다.
<500일의 썸머>는 톰의 입장을 취하며 우리가 저지르는 착각과 실수를 반복한다. 이러한 설정은 지난 사랑을 두고 자신의 잘못은 줄이고, 상대의 흠은 키우는 모습을 보인다.
톰은 낭만적 사랑을 꿈꾼다. 건축가가 꿈이었다는 설정은 톰이 꿈꾸는 낭만적 사랑과 대응한다. 톰은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을 꿈꿔왔다. 그러나 톰이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건축가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서머와의 사랑은 무너진다.
톰은 건축가라는 꿈을 포기한 이유를 먹고사는 일이라는 현실의 탓으로 돌려왔다. 톰은 사랑(낭만)의 실패에도 마찬가지로 대한다. 서머는 운명과 같은 수사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낭만적 사랑’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데 서머는 톰과의 사랑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택했다. 톰과 해후하며 그렇게 거부해왔던 운명을 들먹인다. 언급된 사실들만을 봤을 때 서머는 이율배반적이다. 서머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영화가 톰의 입장에서 흘러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관객이 공유한 톰의 500일에는 서머를 가해자로, 톰을 피해자로 만들 수 없는 균열이 있다.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서머의 취향은 단칼에 무시됐다. 술자리에서 서머에게 집적대는 남자 앞에서 머뭇거리던 톰은 “저런 녀석이 남자친구라니”라는 자신에 대한 모욕을 듣고서야 싸움을 시작한다. 이처럼 영화는 서머와의 관계에서 일방적이고,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톰의 모습을 흘린다. 톰은‘낭만적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것 앞에서 성실하지 못했다.
이러한 균열은 두 주인공을 놓고 “네가 더 나빠”라고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영화는 두 사람이 겪은 사랑의 과정에서 한 사람의 입장만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어느새 영화는 서머를 비난하는데 몰두할 수 없는 역설적 상황에 선다.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는 없다. 영화가 하나의 사랑을 향해 행한 해부가 매 순간 달랐던 사랑이라는 정념을 최선의 형태로, 온전히 정리한 것이다.
개별적이고 특별하게 여겨졌던 나의 사건이 개념화되고 객관화되며 세상 속 수많은 사정 중 하나가 되는 것은 씁쓸하다. 나를 휘감았던 사랑이 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500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달콤함이 씁쓸함이 되고, 뜨거움이 차가움이 되며, 주관이 객관이 되는 과정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여기에서 <500일의 서머>는 통속적인 로맨스물을 벗어나는 영화가 된다.
500일, 다음, 통과와 성장
성장은 지나가는 것이다. 성공적인 통과를 통해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일이다. 가을을 마주한 톰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겨울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 다시 여름에 당도하며 순환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성장이란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나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끝났을 때 우리는 상대를 향해 절치부심 애가 탄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 상처에 도달했을 때 진정으로 마주하는 것은 결국 나이다. 하나의 사랑을 통과하고 결국 그것을 완성시키는 일은 내가 상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톰은 여름을 통과해 성장했을까. 톰은 포기했던 건축가의 꿈에 도전한다. 면접장 앞에서 어텀(가을)을 만난다. 러닝타임 내내 방향을 제시하고 톰을 설명하며 정형화시키던 내레이션을 막아선다. 영화 중 톰이 가장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500일 동안 톰은 변했다. 현실과 타협하며 버렸던 꿈을 다시 짊어지고, 자신의 의지로 한 걸음을 디뎠다는 정황만으로 톰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단정 짓기는 조심스럽다. 그래도 이를 확대 해석하고 싶은 마음을 품는다. 그것이 과한 도식화나 비약이 될지라도 말이다. 영화가 이끌고 관객이 지켜본 500일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최선이었다.
서머와의 500일이 반성의 시간이 아니었기를, 나를 더 사랑하는 시간이었기를, 새롭게 찾아온 어텀(가을)과의 사랑이 어느 시간보다 성실하기를. 그런 의미로 그가 ‘성장’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