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ut to Frame Dec 10. 2016

[Cine] 희망은 늘 밑바닥에 깔려있다

[두더지] (Himizu, 2011)


불안의 형식


  [두더지]의 배경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떠오르게 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것처럼, 재난 후 모습은 참혹하다. 외형만 그런 것이 아니다. 더욱 끔찍한 모습은 그 한가운데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두더지]의 주인공 스미다 군의 삶은 절망적이다.  이유도 없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싫어 도망간 엄마, 장사가 되지 않는 보트 대여소. 스미다 군의 주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노숙자들만 가득하다. 거듭 '평범한 게 최고'를 외쳐보지만 단단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이는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런데 영화는  절망의 정서를 거듭 반복하면서도 '절망'의 정서에 집중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촘촘한 논리로 짜여 있지는 않다. 이 지점이 매우 문제적이다. 관객은 논리적 공백에서 혼란을 느끼며 불편함, 불쾌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두더지]는 산만한 영화이다.



순간의 극단  


  [두더지]의 감독 소노시온은 '스타일'을 갖고 있다. 양산하듯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그는 'B급', '병맛'으로 지칭되곤 한다. 조금 고상한 말로는 '균열', '불균질'로도 불리곤 한다. 나쁘게 말하면 '난삽함'에 대해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카메라 앞 형성된 순간의 극단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다. '순간'들이 불균질 하게 모여 하나의 영화가 되는 모습은 콜라주 미술 형식과 닮아있다. 때로는 그것이 지나치게 산만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른 그의 영화처럼 [두더지]도 모순으로 가득하다. 영화의 뿌리가 되는 정서는 '절망'이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소노시온 특유의 폭력과 불안, 따뜻함과 연민의 정서가 공존한다. 그 모순은 서사나 영상을 통해 해결하지 않는다. 영화는  나름의 기준에 의해 설정된 개별적인 순간 (단위)에 집중하는 가운데 논리적 공백들을 무시하고 지나쳐갈 뿐이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적어도 [두더지]에서 만큼은 위대한 영화의 형식이 된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성실한 해석이자, 지금 세계에 대한 성실한 기억법이 되기 때문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통념에 따르면 무겁다. 소노시온의 스타일은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선입견 없이(기준 없이) 절망을 향해 순간순간마다 다른 결의 시선을 들이민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작가(감독)의 마음에 맺힌 주관적인 대상(절망)을 성실하게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불가능했던 도약


  결말부, 주인공(스미다)이 비를 헤치고 앞을 향해 달린다. "스미다군. 파이팅"이라는 메시지를 외치는 상황이다. 주인공 앞의 갈등이나 난관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논리로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이에 수긍하게 된다. 스크린은 '절망을 보여주지만 관객은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논리적 관계를 뛰어넘어 기이한 감정의 도약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절망'은 단순한 정서가 아니다. 한 시대를 규정하며 생활화된 죽음의 논리이자, 죽임의 질서이다. 절망 속에서 "간빠레"를 외치는 것은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영화가 끝난 후의 시간이 존재함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시간(도래할 시간)이 기존의 절망의 질서와는 달라야 한다고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희망은 마냥 기다리면 오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억압된 질서를 중지시키고, 극복할 때 찾아온다. 스미다, 케이코가  울부짖는다.  불가능한 말들이 말 되어지는 순간이다.  지극히 자의적인 오독일 것이다.  그래도 확신을 갖는다. 스미다,  케이코의 외침은 숭고한 투쟁이다. 그리고 곧 그들의 외침은 현실이 될 것이다.


  

 *    2016년 초, [두더지]를 봤다. 내게 [두더지]는 2014년 4월, 그리고 그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영화였다.  2016년 12월이다. 공식적인 기록은 3년 전 4월을 단순히 '비극', '절망'으로만 기록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군가는 이를 '희망'으로 '기억'하기 위해 몸을 바쳤다.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낸 성실한 기억은 언제나 (추악한) 기록을 이겨낸다.   

                          "희망은 늘 그렇듯이  순진하게 밑바닥에 깔려있다."(우물에서 하늘 보기 中, 황현산, 삼인)
 







작가의 이전글 [Cine]극단적인 것, 불가능에 전부를 거는 행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