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린다. 어젯밤 하도 칭얼거려 데려온 둘째 아이가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아이가 깰까 봐 서둘러 알람을 끈다. 밖은 아직도 깜깜하다. 춥다. 나는 추위가 싫다. 몸도 찬데 나를 감싸는 공기까지 차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게으름, 혹은 느긋함을 죄라고 배워온 나는 추운 계절을 견디는 것이 힘들다. 안 그래도 정적이고 에너지가 낮은 내가 추위를 만나면 더 웅크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내가 늦잠을 자면 아이가 학교를 못 가니 말이다. 첫째 아이에게 다가가 껴안고 쓰다듬는다. 아이는 우웅하면서 뒤척일 뿐 일어날 생각은 없다. 나는 촉감에 예민한 데다 어려서 부모님에게 몸으로 하는 사랑 표현을 받아보지를 못했다. 내가 아이를 껴안고 쓰다듬는 건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순전히 노력에 의한 것이다. 아이를 안고 쓰다듬으면서도 내 손길이 어색하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아이도 그걸 느낄지 걱정한다. 아이는 아침잠이 많다. 일어나지를 못하는 아이에게 속삭인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문득 학창 시절 엄마가 나를 깨우던 풍경이 떠오른다. 엄마는 방문을 열고 문 앞에 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 학교 가야지. 벌써 00시야. 내가 일어나지를 못하면 몇 번은 좋은 말로 하다가 결국 소리를 지른다. 일어나! 엄마가 몇 번을 깨워! 나는 엄마가 소리 지르는 게 싫었다. 싫기도 했거니와 이해도 가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하면 다 알아듣는데 왜? 웃긴 건 엄마가 된 나도 내가 싫어했던 친정엄마의 모습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도 하굣길에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산만한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며 화를 냈다. 이 아이에게는 늘 양가의 감정을 느낀다. 얘 때문에 미치겠고 그런데 미안하고, 사랑은 하지만 힘들고. 잠에 취해 있는 아이를 보니 천사가 따로 없다. 괜히 미안해진다. 그때 아이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안 하던 짓을 한다. 아이를 업고 거실까지 데려온다. 담요를 하나 덮어주고 아이가 잠에서 깰 동안 옷을 입었다. 시계를 보니 거울 보고 세수할 시간도 없다. 아이를 모질게 깨우지 못한 대가다. 매번 이렇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양보하고 희생만 해서 일상이 힘들고 우울을 달고 사나 생각했다. 아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할 시간이 없다. 첫째 아이 옷을 챙긴다. 주노야 옷 입어. 한 번 말해서 들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내 목소리는 협박용으로 바뀐다. 엄마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하는 거야. 아이는 내 목소리의 변화를 알아챈다. 그리고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는 동안 둘째가 일어나 방에서 뛰어나온다. 잠에서 깨면 칭얼거리는 거 없이 알아서 침대에서 내려와 내게 폭 안기는 둘째는 너무 귀엽다. 잠시 화가 가득했던 내 마음이 싹 비워진다. 첫째 아이가 옷 입는 걸 확인하고 아이의 핫초코를 준비한다. 늘 심혈을 기울인다. 1g의 차이도 알아채는 예민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니까 장인의 마음으로 핫초코를 만든다. 아침 지뢰를 피해야 한다. 다행히 지뢰는 터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지뢰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까지 준비시키고 겉옷을 입을 시간. 갑자기 추워져서 아이들에게 겨울 잠바를 꺼내 주었다. 첫째 아이는 그 옷을 입기 싫다고 울며 떼를 썼다. 불편하고 무거워서 싫다는 아이에게 이건 네가 작년에도 입은 옷이고 오늘은 추워서 이걸 꼭 입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변화에 민감하다. 옷을 꺼내 주기 전에도 사실 조금은 두려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촉박한 시간 안에서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 학교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오빠가 울고 화를 내면 불안함을 느끼는 둘째는 울면서 내게 파고든다. 그야말로 난리부르스. 소리와 갈등에 민감한 내가 육아서의 지침처럼 평상심을 유지하며 아이들에게 말할 리가 없다. 아이의 불편함에 공감하는 시간은 이제 끝이다. 가슴속에서 일렁이던 화가 폭발하여 입 밖으로 나간다.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이의 겨울 잠바를 유모차에 걸고, 그럼 입지 마! 외치고 문에 열쇠를 꽂는다. 싫어. 춥잖아!!! 아이는 소리친다. 그리고 결국 겨울 잠바를 입는다. 나는 곧 후회한다. 이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그냥 추워도 아이가 입고 싶다는 옷을 입혀야 했을까. 후회해도 늦었다. 학교 교실에 도착해 들어가려던 아이에게 사과한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그리고 다음 말도 빠지지 않고 한다. 근데 주노도 엄마 좀 도와줘. 주노도 화내지 않고 말해보자. 말하면서도 의미 없다는 생각을 조금 한다. 이 말을 백만 번도 더 한 것 같은데. 아니다. 육아는 마라톤이랬다. 반복에 반복에 반복이다.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 아이랑 사이 다 나빠진 그다음에? 아니다. 이런 생각할 시간이 없다. 둘째 아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한다. 다시 집에 와서 똥 기저귀 갈아주고 아침 먹이고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둘째 아이는 엄마와 어린이집에 있고 싶다고 운다. 우는 아이를 달래서 유모차에 태우고 바쁘게 걸어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엄마랑 떨어질 생각에 아이는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공교육이 시작되니까. 우는 아이를 뒤로하고 나오면서 하루 일정을 생각한다. 생각하다가도 우는 아이의 얼굴이 이따금 떠오른다. 인간은 참 오묘하다. 좋으면서도 싫고 싫으면서도 좋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기쁨, 슬픔, 화, 분노 같은 하나의 단어로 정의될 수 없는 감정. 아니, 기쁨이라는 말에도 모두의 정의가 다를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두의 답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복잡 미묘해서 재밌는 것이 인간이겠지. 그리고 그러니까 힘든 것이 인간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