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꼭 좋을 필요 있나요?
어제 랩 세미나에서 교수님이 던지신 질문이다. 이 한 마디 질문으로 인해 클로징 멘트를 맡았던 한 행사에서 모든 이들을 굳어버리게 하셨다고 한다. 행사 주제가 '좋은 삶' 이었기 때문이다...어떤 삶이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행사였을텐데, 행사 주최자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늘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시고, 자유롭게 사시는 교수님 답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행사 주최자의 표정을 상상해버렸다.
생각해보면 뼈 있는 질문이다. '좋은'과 '좋지 않은'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의해 갈라진다. 또한 '좋은'과 '좋지 않은'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좋지 않은'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삶을 누군가가 '좋은'과 '좋지 않은'으로 결정지을 수 있을까. 아니 결정지을 권리가 있을까.
교수님께서 꼬집고 싶은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삶은 하루 하루가 연결되어있고, 우리는 과정 속에 있다. 시간은 흐르지만 '나'라는 존재는 여전히 그대로 이 자리에 있어, 어제의 일이 원인이 되어 오늘의 결과로 돌아오고, 내일을 생각한다. 죽을 날 즈음 되어 이제까지 켜켜히 쌓아온 것들을 돌이켜보며 '괜찮은 삶이었다'라고 총평을 내리는 것과 오늘 단지 원하는 회사에 불합격되어 '난 실패했다' 라고 결단내리는 것은 좋은 판단이라고 볼 수 있을까.
교수님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해외에서 어떻게 잡을 구하셨는지, 서른 중반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교수님의 30대의 어느 순간은 남들이 볼 때 '좋은 삶'이 아니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어느 순간 풀리던 날도 있었고, 다시 풀리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 과정의 중간에 계시지만, 아티스트로서, 교사로서 어떻게든 나아가고 계셨다.
어떻게 보면 내가 겪지 못한 서른을 파란만장하게 겪고 이제 마흔을 접어드신 교수님이다. 아직 겪지 못한 서른도 있는데 스물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말이 나에겐 많이 위로가 됐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내가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 현재였으면 좋겠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자.
만사를 두려워하기보단, 매 하루 더 묵묵하게 나 하고 싶은대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