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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 Jan 03. 2021

기억과 문장



한동안 더럽혀져 있던 방을 정리했다. 말끔해진 방을 휘익 둘러보는데 언젠가 책장에 붙여 둔 작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께 아마도 한 5년 전쯤 받은 쪽지 같은 편지였다.

 「부족한 나와 지금까지 오랜 시간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은 지가 참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포스터를 만들고 문장을 다듬고 교열을 봤다. 옆에는 동백꽃을 틀어 놓았다. 글 볼 때는 아무것도 틀지 않지만 왠지 오늘만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구질구질하고 박복한 삶 속의 동백이, 그의 태연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동백이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내 이름도 목화나 목련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다 인생이 늦봄 꽃처럼 금방 저버릴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뤄지지 않아도 되는 작은 소망일 뿐이었다.

다시 눈을 돌리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애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였다.

 「내가 이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없소이다  차례에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상의 연인이 아닌 내가 이상이 아닌 이에게 과분한 글귀를 받았더랬다.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과거들이 구석에서 튀어나온다. 가슴 저미는 사건이다. 이런 자질구레하고 찌질한 일들은 제발 내 삶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더 선명하게 남는다. 기억으로,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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