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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연 Mar 30. 2016

자연스러운 인생 -1-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다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다.” 

Y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읽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Y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알아?”

Y가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는 더 대꾸하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불행이 어째서 재미와 관련이 있냐고 말하면, Y는 역설이나 반어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나를 달달 볶을 게 뻔 했다. 나는 역설과 반어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할 줄 몰랐다. Y는 예전부터 상식이라는 단어를 곳곳에 뿌려가며 차이점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Y에게 설명을 원했던 적이 없었다. 역설과 반어의 차이가 인간의 삶에 뭐 얼마나 대단한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Y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나의 의사 따위는 쉽게 무시할 줄 알았다. 나는 자주 Y의 그런 성격에 감탄했다. Y는 고집만큼 몸매도 감탄스러웠다. 나는 그런 Y의 몸매를 즐겨 볼 수 있었다. Y는 내 여자친구였다.  

Y는 책을 좋아했다. 내 방에 올 때면 침대에 올라앉아 다리를 꼰 채 책을 읽었다. 내가 들은 척을 하지 않아도 큰 소리로 읽었다. 자주 책을 추천해주거나 사주기도 했지만, 나는 냄비 받침대로 그것들을 썼다. Y는 그런 용도임을 알면서도 나를 교화해보려 애썼다. 질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책 한 권을 읽어볼 여유도, 끈기도 부족했다. 정말 불행한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나였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가게의 손님이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의 유일무이한 유산인 가게를 물려받게 되었다. 당연한 삶.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삶.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가 연신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만 해대거나 알파고와 인간의 세기의 대결 같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경기가 안 좋으면 사람들은 지갑을 닫는다. 그래도 순댓국 한 그릇을 먹을 정도는 된다. 커피 한 잔이 순댓국 한 그릇보다 비싼 경우도 있으니까. 알파고가 인간을 이겨서 뭐 어쩌란 말인가. 나는 알파고같은 인공지능을 살만한 돈이 없는데. 나는 평생 로봇보다 못한 인간의 일을 하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내 말 따위는 듣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은 일찍이 망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의 사업은 대성했지만, 내가 태어나자마자 폭삭 주저앉았다. 아버지 회사의 주식은 단번에 추락했고, 책임이 몰린 아버지는 건물에서 추락했다. 기적적이게도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화단으로 떨어져 목숨을 건진 대가로 아버지는 평생 병원에 들락거리는 신세를 져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삼십년 동안 돌봤다. 회사가 아버지의 책임감이었다면 평생 아버지를 놓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책임감이었다.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시는 직전까지도 아버지를 걱정했다. 나는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다. 아버지의 일찍이 망한 사업만큼이나 뚜렷하게. 

가게의 매출은 오늘 올해 들어 최저를 찍었다. 최저상. 최정상의 반대말은 최저상, 말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Y가 옆에 있었다면 깔깔거리고 웃었을 것이다. 최정상과 최저상을 비교하며 일장연설을 할 지도 몰랐다. Y는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지방의 사년제 대학에서 굶는 과라고 소문난 국문학과를 전공했다. 그럼에도 Y는 자존심이 강했다. 문학에 대한 자부심인지도 몰랐다. 비극적이게도 Y는 책을 읽는 것에 비해 글을 잘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나는 Y가 쓰는 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어들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는 문장에서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주방과 문으로 연결된 방으로 돌아왔다. 아늑하지만 아득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방이 또다시 더러워져 있었다. 어제 라면을 먹고 그대로 놔두었던 그릇을 들자, 둥글게 받침대 자국이 난 책이 드러났다.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 나는 무심결에 책 제목을 읽었다. 지난 번 Y가 방에 왔을 때 읽어주었던 그 책인 것 같았다.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다, 로 시작했던. 냄비를 주방에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문득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말하던 Y가 생각났고, 자연스레 Y의 탄성을 유발하는 몸매가 생각났다. 

나는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실로 오랜만의 다짐이었다. 책은 표지부터 어두웠다. 남색도 검정색도 아닌 애매한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책 날개를 펼쳐보니 무표정한 작가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절망을 바라는 건 당신이 아니라 작가 본인인 듯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다. 불행한 건 나 뿐 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불행했다. 우리는 모두 불행했다.   

      

나는 곧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동시에 빌어먹을 내용이 궁금해졌다. 반대되는 감정이 동시에 오는 것은 Y를 마주할 때나 있던 일이었다. 섹스를 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지만, 그 후에 몰려오는 잔소리를 듣고 있으면 Y를 침대 아래로 밀어내버리고만 싶은 충동이 들었다.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이긴 건 Y가 읽던 책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가만히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당신,

이제 자신있는 삶을 선택하세요.

우리는 당신의 변화를 믿습니다.

꿈을 이루는 공간, 퍼스트스마일 아카데미     


그럴 듯하게 연결되어 하마터면 책의 내용인 줄 알았다. 나는 전단지를 집어 들었다. 아마도 Y의 가방 속에서 책 사이로 끼어들어간 것 같았다. 전단지는 책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자가 전부였지만 오히려 한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 흔히 붙어있는 광고와도 비슷했다. 요즘은 화려한 디자인보다 문구로만 이루어진 깔끔한 광고가 유행인 것 같았다. 나는 전단지 하단에 적힌 번호를 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오는 스팸 전용 번호가 아니었다. 이제, 하고 자신있는 삶, 을 차례로 읽었다. 자신있는, 자신있는. 나는 지독하게도 내 삶에 자신이 없었다. 

전화를 받은 건 여자였다. 낮은 톤의 목소리였지만 오히려 안정감이 들었다. 여자의 발랄한 “안녕하세요. 당신의 꿈을 이뤄드리는 퍼스트스마일 아카데미입니다.” 다음에 나온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저 ‘이제 자신있는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어, 그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

“네, 무엇을 말씀이신가요?”

나는 머리만 긁적였다. 무언가 강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만이 전화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강한 도움이 필요했던가. 

“자신, 자신있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셔서요.”

“저희는 자신감을 기르고 긍정 언어를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  

퍼스트스마일 아카데미는 도심가의 건물 이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장은 학원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원장은 삼십대 중반으로 보였음에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바로 그 미소 덕분이었다. 

“저처럼 한 번 웃어보시겠어요?”

원장이 더 크게 웃어보였다. 하얗고 가지런하게 정렬된 앞니가 드러났다. 원장은 미소를 유지하며 배려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무언의 부담과 강요가 없는 인상은 오랜만이었다. 가게의 손님들은 대부분 음식이 늦으면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나는 원장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어색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를 닦고 왔지만 혹시나 음식물이 끼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순댓국을 먹고 계산하는 사람들의 이에는 고춧가루가 자주 끼어있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건 새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미소가 굉장히 자연스러우신 거 아세요?”

“그런가요?”

나는 머쓱해져서 허허 웃고 말았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여기를 보세요.”

원장이 거울을 들어 내 앞에 댔다. 눈가의 다크서클과 주름, 푸석하고 생기 없는 피부가 비쳤다.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최근 입병이 도저 붉게 부어오른 왼쪽 입꼬리가 한결 아파보였다. 왼쪽이 비대칭적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오른쪽 입꼬리는 상대적으로 처져보였다. 벌어진 입술 틈새로 보이는 앞니들은 하얗다고 하기도 아주 누렇다고 하기도 애매한 버터색을 띄고 있었다. 대문니 두 개는 다른 앞니들보다 조금 더 튀어나와 있어 입을 벌릴수록 스폰지밥 캐릭터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Y가 언젠가 오빤 가끔 보면 스폰지밥을 닮았어, 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오른쪽을 조금 더, 이렇게요.”

원장이 자신의 오른쪽 입꼬리 위쪽을 검지로 눌렀다. 볼이 푹 들어갔다. 원장이 나에게 똑같이 따라해 보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검지로 내 오른쪽 입꼬리를 눌렀다. 원장이 다시 거울을 들어 내 앞에 댔다. 언젠가 채널을 돌리다 보았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찌르며 귀여움을 자랑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아주 좋아요. 너무 잘하셨어요.”

원장이 작게 박수를 쳤다. 

“그렇게 웃으시는 거예요.”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내는 원장의 노하우인 것 같았다.

Drawing by SEY CHRISTIN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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