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조숙했던 동생
어리바리한 언니가 마냥 한심했었나?
나는 모든 게 늦었다. 특히 눈치가 없어서 어느 집단에서나 남들이 다 아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처음 디자인 회사에 출근했을 때 일이다. 그 회사 분위기가 좋다고 소문이 난 걸 알기에 친근한 태도로 근무할 생각이었다. 회사 규모가 작았고 직원들이 젊었기에 내가 싫어하던 권위주의가 없었다.
직원들 나이도 대부분 어렸다. 특히 나랑 동갑내기 남자 직원이 있었다. 나보다 네 살 어린 동갑내기 남녀 직원도 있었는데 둘이 꽤 친해 보였다.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디자인 회사라 개방적이구나 생각하고 그래야 되나 보다 했다. 그래서 나도 나랑 동갑인 남자 직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친근하게 대했다.
한 번은 회사에서 합숙 여행을 가서 게임도 하고 즐겁게 놀았는데, 내가 갑자기 동갑내기 직원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얘, 뭐지?' 하는 분위기 아닌가. 네 살 어린 동갑내기들도 그러길래 나도 질세라 따라한 건데.
나랑 동갑인 남자 직원은 경상도 출신으로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네 살 적은 동갑내기 직원들은 사귀는 사이였다. 어쩐지 직장 동료가 그렇게 스킨십을 할리가. 나만 바보 된 거다. 따라 해야 하는 줄 알고 있다가.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난 건 그 둘이 사귄 지 1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는 것. 그래서 왜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해주었냐니까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냐고. 당연히 아는 줄 알았단다. 아니 전혀 몰랐다. 그냥 친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 타고나는 것 같다. 누가 꼭 지적해 주고 설명해주지 않으면 눈치 못 채는 것.
나랑 반대로 동생은 눈치가 빨랐다. 특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선험적으로 아는 아이였다. 하루는 동생이랑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외화 장면이 떠올랐다. 홍콩 영화였던 것 같은 데 예쁜 여자가 남자만 보면 반복하는 말이 있었다. 그게 재미있게 들렸다. 그 말은, "손님 오셨어요? 즐겁게 해 드릴게요."였다.
특히 '손'자를 발음할 때 억양을 높여서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 발음이 어찌나 재밌어 보이는지 깔깔거리면서 보다가 따라 했다. 그걸 인형놀이에 응용해보기로 한 것. 그래서 동생이랑 인형 놀이할 때 내가,
"손님 오셨어요? 즐겁게 해 드릴게요."
하니까(동생이 나보다 두 살 어리니, 그때 나는 열 살 정도, 동생은 여덟 살 정도 되었을 거다.) 동생이 갑자기 그런 말은 나쁜 말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즐겁게 해 준다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니까 어쨌든 엄마 아빠가 알면 안 된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참 별 걱정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가 남자한테 즐겁게 해 준다고 하면서, 손님 접대를 극진히 하는 자세가 뭐가 나쁘다는 건가? 하고. 학교에선 도덕 시간에 손님이 오시면 정성껏 대접하라고 배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동생의 조숙함이 놀랍다. 여덟 살짜리가 어떻게 그게 나쁜 말인 줄 알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여주인공은 홍등가에 팔려가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억지로 손님을 받게 하는 과정에서 정신이상이 되어 남자만 보면 자동적으로,
"손님 오셨어요? 즐겁게 해 드릴게요." 하고 앵무새처럼 떠들게 된 것이다.
그런 장면을 보고 나는 열 살이나 되어서 눈치 못 채고 따라한 것이다. 하긴 열 살짜리가 그때까지 동생이랑 인형놀이를 하는 것만 해도 나는 한 참 늦된 아이였다.
또 하루는 텔레비전에 강간범이 등장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인기였던 '수사반장'에서다. 내용 중 강간범이 도둑질을 하고는 유부녀들을 강간해서 신고를 못 하게 하는 수법을 썼다. 강간을 당하는 쪽이 더 수치스러워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의아했다. 방송에서는 강간 장면이 안 나온다. 그저 도둑이 도둑질을 하다가 여주인을 무섭게 노려보는 장면이 나올 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아줌마가 흑흑 흐느껴 운다.
그럼 남편이 퇴근해 와서는 왜 우냐고 하고 부인은 도둑질을 당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남편이 신고하자고 하면 부인이 절대 안 된다고 한다. 남편이 왜 안되냐고 하면서 결국 가정이 붕괴되는 수순을 밟았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화가 난다. 부인이 무슨 죄냐? 도둑질당하고 강간당한 피해자일 뿐인데 남편은 그 부인이 순결을 잃었다며 결국 이혼한다. 그 시대만 해도 여자가 순결을 잃으면 자살을 하거나 이혼당하거나 했다.
그 장면을 보다가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왜 여자가 신고를 안 하냐고 말이다. 도둑은 그냥 여자를 노려보기만 했는데 그게 무서워서 그런가? 그런데 왜 울지? 했다. 그 당시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였다. 조숙한 아이라면 알만한 내용인데 나는 모든 면에서 어리숙했다.
그러자 동생이 옆에 있다가 "나는 알지." 하면서 씩 웃었다. 그래서 나도 알려줘. 하니 너는 몰라도 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왜? 하니 너는 설명해줘도 몰라. 그래서 기분이 나빴던 나는 설명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동생이 대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갔다. 남자가 여자한테 뭘 했다는 게 대체 뭘 했다는 건지 말이다.
우리 집은 딸만 다섯이었다. 그래서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기회도 없었다.
결국 대학생 때 보았다. 전철을 오래 타고 등교했는데 어느 날 전철을 타자마자 잠이 들었나 보다. 한참을 자다가 본능적으로 내릴 역이 다가오자 눈이 떠졌다. 그런데 그 전철 안에는 아무도 없고 나와한 남자, 둘 뿐이었다. 그 남자가 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 많은 좌석을 마다하고.
그런데 좀 이상했다. 그 남자는 그 당시만 해도 영화배우나 주로 입는 베이지색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잠이 덜 깨어서 그런지 눈앞에 이상한 물건이 보였다. 그 남자 양손은 내 얼굴을 감싸며 바바리 앞섶을 앞으로 나란히 잡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보고 궁금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남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슬금슬금 몸을 빼더니 옆 칸으로 이동해 버렸다.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동생에게 했다. 그러자 동생이 혀를 끌끌 차면서 "그거 남자 **잖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바리 속의 남자는 바바리 말고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잠에서 깬 여자애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려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동생이 존경스러웠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따로 과외를 받았나? 동생이 말했다. "너는 정말 너무 둔해. 그걸 꼭 가르쳐줘야 아냐? 위치상 그렇고. 그리고 그거 미친놈이야."
그 외에도 동생은 나보다 모든 게 한 수 위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세상만사 다 파악하고 나온 아이처럼 굴었다. 그러면 나는 동생이 부러웠다가 놀라웠다가 했다. 동생은 그런 나를 놀려먹는 재미로 살았다. 그건 또 나를 무시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든다. 동생은 자기가 세상을 빨리 떠날 걸 알았나? 남들이 90년 살 걸 삼분의 일로 압축해야 했으니 남들보다 빨리 성숙할 필요가 있었나? 제일 일찍 영근 과일이 나무에서 제일 빨리 떨어지니까. 지금 동생은 하늘에서 심심할 것이다. 내가 없어서. 어리바리한 언니 놀려먹는 재미로 살았던 동생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