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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r 05. 2021

우아한 노년 타임 누룽지

우아한 매직- 노년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보온해 둔다. 편리함 때문인데, 보온 기능은 만족스럽지 않다. 이럴 때 나의 특기가 발휘되곤 한다. 또, '돈 안 되는 상상'이다. 혹시 나만 모르게 현재 연구 중인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런 제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상한 보온밥솥은 이렇다.(아무리 비싼 전기밥솥이라 하더라도 보온 시간이 흐르면서 밥맛이 점점 없어진다. 밥 위에 흐르던 윤기는 고사하고 밥알 자체의 습기가 사라져서 딱딱한 밥이 된다. 찬밥은 데우면 되지만 건조해진 밥은 밥맛을 되돌릴 수가 없다. 밥 솥 안에 간장 종지를 넣고 그 안에 물을 부어 놓기도 했다. 그러면 딱딱해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밥맛은 그저 그렇지만.)


 내 아이디어는 전기밥솥 뚜껑에 비밀이 숨어 있다. 그 안에 스팀다리미 같은 물통을 장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온 기능을 누를 때 스팀 분사 간격을 미리 설정해 놓는다. 여기서 기술은 미세한 스팀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작은 구멍으로 스팀이 골고루 분사되어 밥의 습기와 윤기를 지켜주게.


 무튼 아직 이런 제품이 없다 보니 버리는 밥이 생긴다. 식구들이 딱딱한 밥을 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농부, 아프리카 어린이, 북한 주민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밥을 버리다니. 내 월급에도 미안하다. 사소한 낭비가 모이면 그것도 큰돈인데. 그러다가 최근 좋은 해결책을 발견했다.


 말라비틀어진 밥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이땐 말라비틀어질수록 좋다. 시간과 전기를 아낄 수 있으니. 지난주 남편의 야심작인데 '누룽지 만들기'이다.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각자 새로운 요리를 실험하고 있다. 백종원 프로그램이 촉매제가 되었다. 백 셰프는 대한민국 남편들을 부엌으로 불러 모았다. 원래부터 요리에 관심이 던 남편은 지난주 말라버린 밥을 버리지 않고 누룽지를 만들었다. 딱딱해진 밥을 프라이팬에 최대한 얇게 편 후 약불로 굽는 것이다. 누룽지는 심심할 때 간식으로, 밥맛이 없을 때 물을 넣고 끓여 눌은밥을 해 먹었다. 밥솥에서 실려나가던 밥을 심폐 소생한 것이다. 게다가 누룽지 계에선 밥의 신선도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건조될수록 인정받는다.


 예전에는 솥에다 밥을 하니 집집마다 누룽지가 늘 있었다. 아까운 쌀이 누룽지가 되는 게 아까워 밥을 최대한 많이 긁은 후 얇은 누룽지를 만드는 게 기술이었다. 그  바싹 구워서 설탕 뿌려 먹었다. 요즘 누룽지는 마트에서 사야 된다.


 얼마 전 친척이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이 지방에 있었는데, 직장 때문에 못 갔다.(요즘은 인원수 제한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그런데 내 또래 중 장례식에 참석한 사촌들이 꽤 있었다. 연가를 내고 왔나 했다. 알고 보니 퇴직해서 시간이 난 거였다.

제법 큰 회사 간부였던 사촌은 작년 코로나 한파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나보다 어린데, 내 나이가 벌써 이렇다고? 꽤나 충격이었다. 이제 사회생활을 좀 알게 되었는데 벌써 퇴직할 나이라니.


 사촌언니가 말했다. "부럽다. 다들 회사에서 명퇴금도 주니. 명퇴금 주면 나도 이제 쉬고 싶다. 벌써 내년이면 환갑인 나이에 아직도 일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사촌 언니는 속옷가게를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그러면서 요즘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 속옷도 안 사 입는단다. 그러자 한 사촌이 말했다. "나는 요즘 불경기이기도 하고, 애들도 다 컸으니 가게 그만하려고." 여기저기서 부럽다는 말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나도 요즘 체력이 달린다. 명예퇴직을 한 친구가 마냥 부럽다. 막상 집에서 쉬면 또 직장생활이 그립다고 들 하는데.(이런 내 마음 뭐가 뭔지) 내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는 건 이제, '직장생활'이라는 긴 레이스의 '중단'이 아니라 '완주' 개념이다. 젊은이들에게 양보해주는 의미까지 있다.


 은퇴를 직장생활 한정하면 안 될 것 같다.  육아로서의 완주, 프리랜서로서의 완주도 해당되니까. 예를 들어 외가의 칠순이 넘으신 고모는 주부로서의 완주를 마치고 그림에 몰두하셨다. 원래 미대가 꿈이었던 그분은 현재 전시회까지 할 실력가다.


 누구나 현업에서 물러날 때가 온다. 그 자리가 어느 것이든, 물러날 수 있는 것도 행운이 아닐까? 지긋지긋한 출근전쟁에서 해방되는 거니까. 남의 눈치를 보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머지않아 나도 현업에서 물러날 때가 올 것이다. 그땐 뭘 해 볼까? 그림을 그려볼까? 시를 써 볼까? 새로운 악기를 배워볼까? 정원을 가꿔볼까? 프랑스 요리를 배워볼까? 마라톤을 뛰어볼까?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가슴을 설렌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니 잘하지 않아도 되고, 맘에 안 들면 그만두어도 되고, 다른데 관심이 생기면 금방 갈아타도 되고, 아님 여러 가지를 다 해도 되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고, 누구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경쟁심도 필요 없고.


 이는 마치 지출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를 손에 쥔 기분이 다. 지금은 늘 주어진 시간 한도 내에서 잘게 잘게 쪼개 쓰느라 '시간 구두쇠'로 살고 있다. 우왕좌왕, 안달복달, 엉거주춤, 우당탕탕 거리던 시간들을 말끔히 정리해 버리는 단어, '은퇴'


 우아하고 안정되고, 풍요(이것까지 있으면 더욱 좋겠지) 로운, 모든 조건이 허용되는 은퇴 이후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러고 보면 '늙음'에 대한 두려움은 허상이 아니었을까? '나이가 많다'는 건,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제 모든 의무로부터 말끔히 해방시켜주는, 우아한 '매직'일지도 모른다. 마치 밥이 마르면 맛있는 누룽지로 변신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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