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서야 안거야 고구마 줄기
누군가에게 손길을 주는 것
최근 좋아하게 된 반찬이 있다. 고구마 줄기다. 이 반찬에는 특별한 고유명사가 없다. '무엇'의 줄기 부위라는 설명뿐. 자칫 버릴 수 있는 식물의 부산물이다. 이 이름이 주목받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의 해방 일지'라는 드라마에서다. 그 드라마에서 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남자 주인공이 유흥업소에서 밥을 먹다가 반찬으로 고구마 줄기를 쳐다보는 순간이다. 고구마는 비싸다. 하지만 고구마를 매달고 있던 줄기는 별로다. 누군가 그 줄기를 반찬으로 만들었다.
이 반찬으로 말할 것 같으면, 딱 인건비 도둑이다. 이 반찬을 해 먹으려면 줄기를 벗겨내야 한다. 안 그러면 간이 베어 들지 않을 만큼 껍질이 단단하다. 줄기 껍질 하나하나를 벗겨내다 보면 손가락도 아프고 시커먼 물이 든다. 허리가 아픈 건 덤이다. 반찬을 해 먹으려다 병을 얻을까 봐 걱정이다. 그걸 까느니 안 먹고 만다고 다짐할 정도다. 간혹 길가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들이 고구마 줄기를 까고 계신다. 그걸 하루 종일 까서 팔아 생계를 잇는 것이다.
고구마 줄기는 특별한 맛이 없다. 수박껍질 내지는 노각 같은 지위에 있다. 갖은양념을 하면 겨우 맛이 생겨나는 밍밍한 음식이다. 풀 비린내가 난다고 할까. 그런 음식을 알게 되는 과정은 대개 나이 순이다. 결혼한 첫해 명절을 쇠고 각자 집으로 갈 때였다. 시어머니는 바리바리 음식을 싸 주시면서 형님들에게 고구마 줄기를 가져갈 거냐고 물어보셨다. 그때마다 형님들은 "네."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고 식구도 없어서 안 가져가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당돌한 새내기 며느리 태도에 멈칫하시던 시어머니. 그 후로도 여러 번 물어보셨지만 한 번도 가져간 적이 없다. 아니 한 번쯤 싸주신 것 같은데 안 먹고 결국 쓰레기 통행이었다. 그런 고구마 줄기.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 식물을 탐하게 되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훨씬 전부터다. 갱년기 그림자로 고생하던 즈음 같은데, 그 고구마 줄기가 먹고 싶어서 아파트 장에서 파는 걸 사 왔다. 그런데 어머님이 하신 것만큼 맛이 나지 않는다. 결국 어머님에게 구조요청을 했다. 당연히 맛있게 요리까지 해서 보내실 줄 알고. 그런데 전화를 받으시는 어머님의 음성이 기운이 없으시다. 내가 전화를 건 걸 무척 기뻐하시는 듯하다. 어머님께 간단히 안부를 묻고는 대뜸, "고구마 줄기가 먹고 싶어요. 지금 보내주실 수 없나요?" 하니 어머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아이고 이제 내 다리가 아파서 몬한다. 그거 깔려면 하루 종일 앉아있어야 하는데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다."
따서 보낼 테니 직접 껍질 까서 해먹으라신다. '이게 아니었는데.' 고구마 줄기의 지위가 격상되는 순간이다. 다른 음식은 해서 보내시는데 그것만은 안 해주신단다. 껍질 까는 게 힘들어서다. 그런데 나는 딱 고구마 줄기가 먹고 싶다.
그렇게 해서 고구마 줄기 한 박스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처음엔 이게 뭐라고 하면서 신문지를 넓게 펼쳤다. 하지만 까도 까도 줄지 않는다. 까놓고 보니 원래 길이의 반의 반토막이 났다. 성질 급한 내가 껍질 까는 법을 모르니 자꾸만 부러뜨려서 깠던 것이다. 양쪽으로 서너 번씩 부러뜨리다 보니 몇 센티미터 남질 않는다.
내 입맛이 점점 손이 많이 가는 음식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손을 벌릴 데가 없다. 시장에서 파는 건 너무 비싸기만 하고 싱싱하지 않다. 비싼 이유를 알겠다. 김치를 해 먹으려면 몇만 원어치는 사야겠다.
타고 난 존재 가치는 별로지만 정성스러운 손질을 통해 가치가 생기는 존재가 있다. 이 고구마 줄기처럼 말이다. 원래는 주목받지 못하지만 손질이 가해져서 귀한 반찬이 되는 것이다. 그 손질은 '사랑'이다. 사랑을 긴 시간 노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드라마 내용 같다. 남자 주인공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지만, 한 사람의 '추앙'을 통해 누군가에게 소중해졌다.
나는 어느새 어머님의 손길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어머님의 고구마 줄기 무침은 먹지 못한다. 더 나아가 고구마 줄기를 캐어서 보내주기도 힘드실 거다. 매번 이렇게 삐그덕 댄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내가 원해도 되는 시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