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제자리로 서게하는 힘 된장찌개
이제야 겨우 된장찌개 하나 제대로 끓일 줄 알게 되었다.
된장찌개는 우리나라 대표 찌개다. 하도 많이 먹으니 식상하다. 때론 식상함이 삶의 지표가 된다. 거친 시간들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서게 하는 힘으로.
친구들에 비해 늦게 결혼했지만, 시댁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였다. 시댁 고향인 부산 사투리가 낯선 것도 있었다. 애꿎은 남편에게 투정 부렸다. 경상도 사투리는 너무 억세다고. 또 경상도 음식은 별로라고도 했다. 그러자 남편 말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시다고.
그 말은 맞았다. 시어머님 요리를 처음 맛본 날이다. 그날은 옆집 친구분도 놀러 오셨는데, 내 손목을 보더니, "아유, 이렇게 가는 손목으로 어떻게 살림을 한데. 매일 밥해 먹으려면 힘들겠다. 시어머니 된장찌개를 배워야 하는데. 이 된장찌개로 말할 거 같으면 아무도 못 따라와. 다들 비법을 배우려고 난리야."
하시며 된장찌개를 한 술 뜨셨다.
"이게, 이게 말이야. 참 기가 막히단 말이지. 이 맛은 아무도 흉내 못 낸다고."
그 말씀은 맞았다. 어머님의 된장찌개는 탁월했다. 그 찌개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야채뿐. 그런데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신세계가 들어있었다. 소박한데 유려하고 깔끔한데 구수하고, 투박한데 맑은 맛. 반대되는 형용사가 각자 제자릴 지킬 수 있다니. 한쪽이 커지면 한쪽은 이울어지기 마련인데. 나도 이 맛을 배우리라 결심했다.
남편과 나는 IMF 직후 어렵게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후 남편은 회사를 나와 덜컥 사업을 시작해버렸다. 하지만 정부의 부양정책 덕분인지 걱정과 달리 사업이 잘 되었다. 일중독자였던 나는 당시 아이 둘을 낳고 집에만 있었는데, 그 열정을 온통 살림에 쏟아부었다. 특히 요리에 집중했는데 나중엔 요리수업까지 들었다. 당시엔 생활비가 넉넉하던지라 수업에서 배운 대로 값비싼 재료를 사다가 반찬에 응용하곤 했다. 그 응용력은 광개토대왕처럼 넓혀져 갔다. 특히 된장찌개에 창의성을 발휘하곤 했다. 된장찌개는 남편이 좋아하는 데다 실패 확률도 낮아서 만만했다.
차돌박이를 넣으면 기름이 좌르르 흐르면서 화려한 풍미가 더해졌다. 대하를 넣으면 바다향이 더해져서 산해진미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된장찌개에는 이렇듯 다른 재료를 두루 받아주는 순한 면이 있다. 맛도 그렇다. 자신의 맛을 잃지 않는 지조와 유연성을 동시에 지녔다.
그러자 식당처럼 늘 같은 맛을 내는 시어머님 된장찌개가 밋밋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진짜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속으로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끓인 건 가짜였나?'
남편은 어머님께 레시피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어머님은 별거 없다고 하시면서 가르쳐주셨다. 먼저 멸치를 푹 우려낸 육수에 체에 거른 된장과 애호박, 감자, 양파, 표고버섯을 넣고 익힌다. 그리고 홍고추, 청양고추, 대파, 두부, 멸치가루를 넣고 한소끔 끓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된장찌개를 일반 냄비에 끓이면 말짱 헛것이 된다. 반드시 재래식 뚝배기에 끓여야 제맛이 난다. 맛의 차이는 먹는 동안 더 벌어진다. 두꺼운 뚝배기가 열기를 가두기 때문.
써놓고 보니 별거 없다. 진짜 비법은 주재료인 된장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님이 직접 담그시는 된장은 약간 짜긴 하지만, 감칠맛이 풍부하고 구수해서 시중 된장과는 다르다. 된장 자체가 맛있으니 아무리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끓여도 기본 맛을 한다. 그 후 어머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끓였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끓이려고 해도 다른 맛이 났다. 직접 끓이는 모습을 보는 수밖에. 그리고 곧 볼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이유로.
남편 회사는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도가 났다. 남편회사에서 받은 대기업 계열사 어음이 사기 어음이었다. 그 후로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 네 식구는 살던 집을 날리고 시댁에 얹혀살게 되었다. 남편이 사업을 시작할 때 내가 그렸던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주변에서 남편이 사업하다 망하면 시댁에서 더부살이하는 걸 종종 보았다. 그때 시부모님은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구박까지 한다. 그러면 며느리는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가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잠적을 한다. 결국 이혼하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시부모님은 나더러 남편 회사에 나가 도우라고 하셨다. 부도난 사업에서 할 일은 뻔하다. 그 뒤로 내 하루는 온갖 수모를 견디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힘들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거나 친정집에 가면, '나쁜 가정 시나리오'를 쓰게 되니. 그래서 진심으로 채권자들을 대하면서 설득했다. 집에서는 최소한의 행복 거리를 찾았다. 그건 '진짜 음식'을 맛보는 일이었다. 어머님이 차려주시는 전통 한식 상차림을.
어머님이 부엌에서 음식 하시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나와 달리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음식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마치 정화수를 떠 놓고 새벽에 천지 심령님께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찌개가 끓어 넘칠세라 수시로 불 조절을 하고, 뚝배기 옆을 닦아내거나 거품을 걷어내곤 하셨다. 결국 어머님 손맛의 비결은 '정성'이었다. 정성 덕분인지 사업은 차차 해결되어갔다.
결국 우리 가족이 따로 나와 살게 되었다. 그 후로도 길고 긴 터널이 이어져 있었다.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도 시냇물처럼 조용히 시간은 흘렀고,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나는 매일 그억그억 된장찌개를 끓이곤 했다. 한창 키가 크던 아이들 밥 수저에, 또 한시름 놓으며 밥을 먹던 남편의 수저 안에도 된장찌개가 있었다. 당시 뉴스에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가족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그걸 보며 밥을 잘 먹는 남편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했다.
밥을 먹으면서 견디어낸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을 일구어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된장찌개. 가끔 된장찌개가 유난히 맛이 있는 날이 있다. 된장찌개는 인생과 닮았다. 꺼이꺼이 견디어내는 일상들. 그 일상에서 건져내는 보물 같은 몇 장의 스냅사진, 그것이 행복이라면 말이다.
고통의 끔찍한 외피를 용감하게 깎아내다가 그 안으로 함몰되곤 할 땐, 된장찌개를 먹으면 된다. 입술이 델 정도로 뜨거운 된장찌개를 한 술 뜨고는 거친 숨으로 후후 불어서 먹으면 된다. 그러면 거친 시간들을 돌고 돌아온 우릴 점잖은 얼굴이 반겨줄 것이다. 된장찌개에는 그런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