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약지에 검푸른 멍이 있다. 이 멍은 식탐에 얽힌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집은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 탓에 늘 먹을 것에 경쟁이 붙었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된 어느 날 하루는 엄마가 잡채밥을 해 주셨다
잡채는 명절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다들 상이 차려지자마자 숟가락을 들었다. 한참 더운 여름이었는데, 엄마가 나더러 선풍기 바람을 '강'에서 '약'으로 바꾸라 하신 것이다.
나는 그 선풍기에 급하게 다가가다 선풍기 날개에 손이 끼고 말았다. 하필 '강'으로 되어있는 상태에서. 아찔한 순간이었다. 피가 철철 났다. 사실 아픔보다는 창피함이 컸다. 이 멍은 아직까지 푸른색으로 남아있다. 이 점은 내게 식탐을 조절하는 경고등이다.
더 오래전 시절에는 형제가 더 많았고 더 먹을 것이 귀했다. 식탐 경쟁이 훨씬 더 치열했을 것이다. 요즘은 한 집에 아이가 한 두 명밖에 없다.
먹을 것이 흔해졌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덜 먹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칼로리가 적고 몸에 좋은 건강식을 예쁜 접시에 담아 먹는다.
우리 아이들은 밥을 차릴 때마다 식탐을 보이기는커녕 여러 번 소리를 질러대야 겨우 방에서 나와 숟가락을 든다.
농업혁명이 있기 전 인류는 동굴에 거주하며 들에 나가 사냥을 하고 살았다. 자생 열매나 동물을 잡아먹었다. 먹을 것이 생기면 무조건 위장에 꾸역꾸역 집어넣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다 멧돼지를 잡아 동굴 안에 가져왔다고 치자. 그 고기를 나누는 규율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연장자나 힘 있는 사람은 살코기 위주로 먹었을까? 아니면 지방을 먹었을까?
아마 지방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그 당시는 힘을 내는 일이 중요했으니.
이제 힘 대신 머리를 쓰는 일이 많다. 게다가 몸 안에 남은 열량은 만병의 주범이다. 되도록 적게 먹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몸'들이 엇박을 내고 있다. 우리 위장에는 이제 더 이상 여분의 음식을 저장할 필요가 없다. 그 역할은 마트나 냉장고가 충분히 대신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마치 내 위가 냉장고나 마트인 듯 다룬다.
아주 오래전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동굴 안에서 서열이 낮거나 힘이 없는 경우 고기나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할 때를 대비해야 했듯이.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늘 허기를 느끼듯 상대방을 다그칠 때가 있다. 아이들이 그렇다.
아들은 집에 오자마자 종종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그때 말 붙이다가 괜히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아들과 제대로 교감하고 싶은 욕심이 화를 부른다. 늘 단답형인 아들의 답변이 못내 아쉽다.
"학원 잘 다녀왔니?"
"네."
"그런데 왜 그렇게 찌뿌둥해 보여."
"그런 거 아닌데요."
"무슨 일 있어?"
"아뇨."(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 버린다.)
"아이고. 답답해."(가슴을 친다.)
사실 아들과 조금 길게 대화하면 꼭 감정적으로 끝이 난다.
"머리 좀 잘라라. 너무 길잖아."
"기르고 싶은데요. "
"보기 싫잖아. 학교에서 안 걸려?"
"안 걸려요."
"그래도 보기 싫잖아."
"엄마 눈에 보기 싫다고 자르라는 거예요? 민주적인 거 좋다면서요?"
"아니.. 그래도 너무 길면..."
아들은 자기 세계 안에서 이미 가득 차 있다. 나만 아귀처럼 허기를 느낄 뿐. 그 허기를 달래느라 아들과 대화할 때마다 별거 없는 말들을 꾸깃꾸깃 집어넣는다. 마치 위속에 지방덩어리를 재빠르게 집어넣듯이.
그러다가 내 '말'들이 체한다.
손가락 위의 푸른 멍을 볼 때마다 내 식탐을 물리치듯이, 말이 허기질 땐 무얼 보아야 할까?
원시 동굴 시대로부터 dna를 통해 내 식탐이 불어오듯이, 아들에게서 느끼는 '말'의 허기짐이 불어오는 곳, 이곳은 '모성애'라는 이름의 노후된 '짝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를 가득 채우니까 말이다.
이제 더 이상은 허기지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