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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Apr 27. 2020

역류성 식도염일지언정 커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역류성 식도염'

의사가 내린 진단이다. 20대 초반부터 줄기차게 커피를 하루에 대여섯 잔씩 마셔온 결과다. 의사 말로는 커피보다 커피프림이 위나 식도나쁘단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원두커피가 드물었던 20대 시절부터,

소위 '다방커피'에 내 혀가 인이 박인 탓이다.


 커피를 '마셨다'라고 하면 너무 가볍게 대하는 기분이다. 나에게 커피는 마시는 대상이 아니다. '먹는' 의식의 대상이다. '마신다'라고 할 때는 식후에 가볍게 소화용으로 아니면 심심할 때 입가심으로 한다. 먹는 행위는 다르다. 밥이나 약은 '먹는다'라고 한다. 끼니를 위해서, 혹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끼니를 챙기는 건 생존에 꼭 필요한 행위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 또한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커피를 먹는다는 게 익숙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커피를 먹는 건 나에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꿀꿀해도 위를 훑어내려 가는 그 걸쭉함에 기대고 나면 한바탕 씻김굿 하듯 속이 후련해지곤 했으니. 내가 처음 커피에 입문했을 땐 커피믹스가 아니라 '삼 형제'로 조제하곤 했다.(삼 형제: 커피, 설탕, 커피프림이 다 따로 담긴 플라스틱 밀폐용기, 손잡이가 달려있어 이동이 편리했다.) 당시엔 사람마다 커피 조제용 황금 레시피가 있었다. 고소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커피: 설탕: 프림을 2: 2: 3으로 스탠더드 형은 1.5: 1.5: 2로 달달한 커피 스타일은 1.5: 2: 2로 이는 순전히 우리 동네 레시피였고 숟가락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신기한 건 똑같은 수저에 똑같은 브랜드 커피로 조제해도 매번 그 맛이 다르다는 것. 예전에는 바리스타라는 말이 없었다. 주로 인스턴트커피를 마셨기 때문이지만, 야매 바리스타 필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지금으로 치면 웬만한 바리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커피에 대한 확고한 철학, 내지는 레시피가 있었다. 그분이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커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이란다. 일반 물이 아니라 약수를 사용했다. 그래야 뒷맛이 깔끔하다나? 그 물을 팔팔 끓이는데 중요한 건 한 김을 빼내는 것이었다. 김을 빼내지 않으면 물에서 잡내가 남을 수 있다고.


 그다음엔 커피잔이었다. 일반 상식과 달리 그분은 도자기로 된 커피 잔은 커피 맛을 떨어뜨린다나? 가장 맛이 있는 커피잔은 뭐니 뭐니 해도 종이컵이라고. 종이컵은 커피를 다 마시기까지 식지 않게 해 주는, 항온성이 좋다면서. 그다음엔 투명 유리잔이라고. 가장 나쁜 건 스테인리스 컵이었다. 스테인리스 컵은 열전도율이 높아서 금세 식는단다.


 그다음은 정확한 계량이었다. 계량용으로는 표준형 크기의 차 숟가락을 이용했다. 그 차 숟가락에 재료를 담은 다음 정확히 손으로 깎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기분에 따라 양이 들쑥날쑥해지기 때문이다.

비율을 정확히 지키고 정확한 도구로 정확히 계량해야 늘 같은 품질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고.


 커피를 그토록 좋아했건만 나는 이제 하루에 한 잔 겨우 마신다. 그놈의 식도염 때문이다. 나이는 나에게서 많은 근육을 앗아갔다. 그 근육은 식도에도 해당이 된다. 툭하면 사레에 든다. 더 큰 복병이 있다. 불면증이다. 젊은 시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이었다. 난 자기 직전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셔대도 잠이 잘 왔다. 안 그래도 젊은 시절엔 잠이 늘 부족했으니.


 나이가 드니, 그 많던 수면 요구 시간이 쪼그라들었다. 밤마다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는 일이 많아진 것. 커피를 저녁 이후에 마시면 그날은 밤을 꼬박 새울 지경이다. 식도염이나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커피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커피가게를 지나다 보면 그 향에 취해 걸음이 느려진다. 커피색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 표지가 커피색이라면 무조건 집어 들고 싶다.


 커피... 그 몹시 낡고 해진 사랑이 내겐 눈물겹다. 이젠 식도염이나 불면증 때문에 아침 일찍 한 잔 정도 마실 뿐인, 내 열렬한 사랑의 흔적,  커피. 오랜만에 유지태와 이보영 주연의 드라마가 나왔다. 남편이 그 드라마에 심취해서 보고 있다. 갑자기 나에게 그런다.

"꼭 우리 같아."

"뭐가?"

하니,

"저 여자 주인공이 말이야, 대학 때 남잘 엄청 사랑했는데... 지금은 남자가 여잘 더 사랑해." (??? 참 단순하게 요약하는 이 실력이란! 2화를 보니, 그렇게 단순한 줄거리는 아닌 듯한데.)


어쨌거나 이러한, 달달 구리 한 대사 같으니라고. 또 한참 머릴 굴린다. 이는,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하고. 세련된 비난인가? 뜬금포 고백인가? 당최 헷갈린다. 또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남편을 그렇게 사랑했었나? 좀 가물가물하다. 생각해 보니 맞긴 한 것 같다. 둘러보니 그 흔적이 집에 선명하다. 그것도 둘씩이나.(아들하나 딸 하나)


 현재 고3인 아들이 가뜩이나 예민한데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혀 있다. 어젠 특히나, 각종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 상황... 어딘가 낯익다. 그래. 맞아. 커피... 한때 내가 무지 사랑했었지. 그럼... 지금은 아닐까? 아니다. 그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단지 식도염이나 불면증이 문제지. 말하자면 나나 커피 잘못은 아니다.


상황이 변한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드라마에 나온 유지태. 그가 예전에 출연했던 영화의 명대사가 그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변심한 것을 두고 한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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