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내린 진단이다. 20대 초반부터 줄기차게 커피를 하루에 대여섯 잔씩 마셔온 결과다. 의사 말로는 커피보다 커피프림이 위나 식도에 더 나쁘단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원두커피가 드물었던 20대 시절부터,
소위 '다방커피'에 내 혀가 인이 박인 탓이다.
커피를 '마셨다'라고 하면 너무 가볍게 대하는 기분이다. 나에게 커피는 마시는 대상이 아니다. '먹는' 의식의 대상이다. '마신다'라고 할 때는 식후에 가볍게 소화용으로 아니면 심심할 때 입가심으로 한다. 먹는 행위는 다르다. 밥이나 약은 '먹는다'라고 한다. 끼니를 위해서, 혹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끼니를 챙기는 건 생존에 꼭 필요한 행위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 또한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커피를 먹는다는 게 익숙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커피를 먹는 건 나에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기분이 꿀꿀해도 위를 훑어내려 가는 그 걸쭉함에 기대고 나면 한바탕 씻김굿 하듯 속이 후련해지곤 했으니. 내가 처음 커피에 입문했을 땐 커피믹스가 아니라 '삼 형제'로 조제하곤 했다.(삼 형제: 커피, 설탕, 커피프림이 다 따로 담긴 플라스틱 밀폐용기, 손잡이가 달려있어 이동이 편리했다.) 당시엔 사람마다 커피 조제용 황금 레시피가 있었다. 고소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커피: 설탕: 프림을 2: 2: 3으로 스탠더드 형은 1.5: 1.5: 2로 달달한 커피 스타일은 1.5: 2: 2로 이는 순전히 우리 동네 레시피였고 숟가락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신기한 건 똑같은 수저에 똑같은 브랜드 커피로 조제해도 매번 그 맛이 다르다는 것. 예전에는 바리스타라는 말이 없었다. 주로 인스턴트커피를 마셨기 때문이지만, 야매 바리스타 필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지금으로 치면 웬만한 바리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커피에 대한 확고한 철학, 내지는 레시피가 있었다. 그분이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커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이란다. 일반 물이 아니라 약수를 사용했다. 그래야 뒷맛이 깔끔하다나? 그 물을 팔팔 끓이는데 중요한 건 한 김을 빼내는 것이었다. 김을 빼내지 않으면 물에서 잡내가 남을 수 있다고.
그다음엔 커피잔이었다. 일반 상식과 달리 그분은 도자기로 된 커피 잔은 커피 맛을 떨어뜨린다나? 가장 맛이 있는 커피잔은 뭐니 뭐니 해도 종이컵이라고. 종이컵은 커피를 다 마시기까지 식지 않게 해 주는, 항온성이 좋다면서. 그다음엔 투명 유리잔이라고. 가장 나쁜 건 스테인리스 컵이었다. 스테인리스 컵은 열전도율이 높아서 금세 식는단다.
그다음은 정확한 계량이었다. 계량용으로는 표준형 크기의 차 숟가락을 이용했다. 그 차 숟가락에 재료를 담은 다음 정확히 손으로 깎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기분에 따라 양이 들쑥날쑥해지기 때문이다.
비율을 정확히 지키고 정확한 도구로 정확히 계량해야 늘 같은 품질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고.
커피를 그토록 좋아했건만 나는 이제 하루에 한 잔 겨우 마신다. 그놈의 식도염 때문이다. 나이는 나에게서 많은 근육을 앗아갔다. 그 근육은 식도에도 해당이 된다. 툭하면 사레에 든다. 더 큰 복병이 있다. 불면증이다. 젊은 시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이었다. 난 자기 직전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셔대도 잠이 잘 왔다. 안 그래도 젊은 시절엔 잠이 늘 부족했으니.
나이가 드니, 그 많던 수면 요구 시간이 쪼그라들었다. 밤마다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는 일이 많아진 것. 커피를 저녁 이후에 마시면 그날은 밤을 꼬박 새울 지경이다. 식도염이나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커피를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커피가게를 지나다 보면 그 향에 취해 걸음이 느려진다. 커피색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 표지가 커피색이라면 무조건 집어 들고 싶다.
커피... 그 몹시 낡고 해진 사랑이 내겐 눈물겹다. 이젠 식도염이나 불면증 때문에 아침 일찍 한 잔 정도 마실 뿐인, 내 열렬한 사랑의 흔적, 커피. 오랜만에 유지태와 이보영 주연의 드라마가 나왔다. 남편이 그 드라마에 심취해서 보고 있다. 갑자기 나에게 그런다.
"꼭 우리 같아."
"뭐가?"
하니,
"저 여자 주인공이 말이야, 대학 때 남잘 엄청 사랑했는데... 지금은 남자가 여잘 더 사랑해." (??? 참 단순하게 요약하는 이 실력이란! 2화를 보니, 그렇게 단순한 줄거리는 아닌 듯한데.)
어쨌거나 이러한, 달달 구리 한 대사 같으니라고. 또 한참 머릴 굴린다. 이는,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하고. 세련된 비난인가? 뜬금포 고백인가? 당최 헷갈린다. 또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남편을 그렇게 사랑했었나? 좀 가물가물하다. 생각해 보니 맞긴 한 것 같다. 둘러보니 그 흔적이 집에 선명하다. 그것도 둘씩이나.(아들하나 딸 하나)
현재 고3인 아들이 가뜩이나 예민한데 코로나로 집에 틀어박혀 있다. 어젠 특히나, 각종 창의적인 방식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 상황... 어딘가 낯익다. 그래. 맞아. 커피... 한때 내가 무지 사랑했었지. 그럼... 지금은 아닐까? 아니다. 그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다. 단지 식도염이나 불면증이 문제지. 말하자면 나나 커피 잘못은 아니다.
상황이 변한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드라마에 나온 유지태. 그가 예전에 출연했던 영화의 명대사가 그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변심한 것을 두고 한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