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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Nov 16. 2021

나를 오래 써 먹으려면다 귤

나를 오래 써먹으려면

“올해 비가 많이 와서 다른 귤은 싱겁다는데 우리 귤은 달더구나.”     

 친정아버지가 귤을 부쳤다며 말씀하셨다. 원래 서울에 살던 친정 부모님은 몇 년 전 건강 문제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노지 귤나무가 몇 그루 딸린 주택을 얻으셨는데 매년 그 나무의 귤을 따서 보내주신다.


이 나무에는 따로 물이나 비료를 주지 않는다. 비가 오면 스스로 수분을 보충하고 건기에 대비해 물을 저장한다. 이때 굵은 뿌리로는 저장 용량에 한계가 있어 길고 자잘한 뿌리를 많이 냈을 것이다. 내공을 키운 결과 올여름 폭우에도 당도를 지켜낸 것 같다.


  도착한 귤 상자를 열자마자 달콤 쌉쌀한 청량함이 훅 끼친다. 서둘러 하나를 까서 입에 넣으니 귤 알갱이들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싱싱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약을 안 쳐서 그런지 금세 짓무르고 하얀 곰팡이가 핀 것이다. 점점 버리는 것들이 많아졌다.


 고민 끝에 성한 것들을 골라 잼을 만들기로 했다. 껍질을 벗겨내고 설탕을 넣은 후 약한 불에 놓고 저어주었다. 위로 수북하던 귤들은 주저하듯이 스물 거리며 냄비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잼으로 졸여진 귤에선 상큼함이 사라졌다.


 대신 깊은 단맛이 나는데, 의외로 다른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 이제는 두고두고 먹을 수가 있고, 무엇보다 귤을 버리며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건 귤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남들의 시선이 내게서 거두어졌다. 나이 탓이겠지만 아무리 꾸며도 외모가 좋아지지 않는다. 시간 앞에 내어준 시선들이 아쉽다. 뭐라도 해보면 나아질까?


 물론 안다. 그런 욕심이 어쭙잖다는 것도, 요즘 주름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것도. 눈을 크게 치켜뜨면 이마 주름도 생긴다. 가로로 세 줄씩이나. 앉을까 말까 눈치를 보듯 아직은 희미하다. 어차피 엉덩이를 들이밀겠지만.       


 기억은 흐릿하지만 내게도 갓 딴 귤처럼 싱그러운 시간들이 있었다. 잔뜩 꾸미고 외출할 때마다 거울을 보며 혼자 만족하곤 했다. 요즘 거울에선, '젊음'을 빌려 입으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젊었을 땐 늙는 게 남의 일처럼 보였다. ‘젊은’ 나보다 ‘젊지 않은’ 내가 훨씬 더 오래 살게 생겼는데.


 이제부터라도 아주 오래 써먹을 나를 만들어야겠다. 혹시 아는가? 그러면 젊었을 때보다 할 일이 더 많아질지.     

 직접 음식을 해서 주변에 나눠주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주로 받아먹던 내가. 이번에 만든 잼도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해야겠다. 손 글씨로 카드도 쓸까?


‘제주도의 강한 바람을 견디고, 뜨거운 볕도 이겨낸, 게다가 이번 여름 긴 긴 장마에서 당도를 지켜낸 기특한 귤로 만들었습니다. 이 잼은 무공해라 건강에도 좋고, 깊은 단맛이 나서 다른 음식과도 잘 어울립니다.’라고.     


  어디선가 '인자한 노인의 이마에는 세줄 주름이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 뭐, 그렇다면 나도.' 하며, 눈을 크게 치켜떠 본다. 이마 위의 주름이 곱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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