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념 말고 대화
갱년기 인어공부 체험판을 겪고 보니.
감기에 잘 안 걸리는 내가 한 달째 감기다. 특히 목소리가 안 나온다. 지난주부터 목소리가 조금씩이나마 나오고 있는데 3주 동안 간단한 발음도 어려울 정도였다.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인데 고역이었다.
목이 너무 아프니 말수를 아껴야 했다. 내가 내 목소리를 아껴야 하다니. 평생 물 쓰듯 펑펑 써재끼던 내 목소리를.
갱년기 인어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말을 하고 싶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는 마치 악몽 속 주인공 같기도 했다. 억울하고 두려운 일을 당했는데 아무리 소리 지르고 울어도 소리가 안 나오는 답답한 상황 말이다. 불투명 돔 안에 갇힌 기분도 들었다. 저쪽 사람들은 끊임없이 조잘대는데, 돔 안에 있는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못 한다.
답답한 한 달을 지나오면서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했던 말들, 남이 했던 말들, 그리고 지금 남들이 하고 있는 말들, 내가 하고 싶은 말들, 해서는 안 되는 말들, 해야 하는 말들, 해도 되는 말들..
처음에 든 생각은 생각보다 많은 말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집안에서도 가족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맞장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쳐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말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남의 말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내 주장을 하는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감기를 오래 앓은 것이 득이 된 셈이다.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나를 어필하고 싶은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런데 말로 나를 어필하는 게 생각보다 부작용이 많다.
나이가 들면 지갑을 결고 입을 닫으라는 말이 있다. 열 지갑이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적어도 입은 닫아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수다스러워지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주변에 보면 과묵하던 사람들까지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강하다.
남의 말을 듣는 기간 중 말의 품질을 평가하곤 했다. 텔레비전 속에서 나오는 말까지도. 출연자가 하는 말 중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면 낙제점, 그저 그런 수다는 평균 점수, 절제된 톤으로 유머까지 곁들인 말을 하면 높은 점수를 준다. 그 보다 한 수 위의 말도 있다. 남에게 해주는 덕담이다. 아부나 오버가 아닌 적절한 칭찬 내지는 격려 또는 덕담은 주변을 밝히는 보약 같은 말들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사람들마다 점수방향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긍정적인 말투를 가진 사람은 늘 밝은 뉘앙스의 말을 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늘 비아냥대는 말을 한다. 말의 내용이 대다수 푸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말로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드라마를 보다 보면 대부분의 대사가 기분 설명에 사용된다. 그 기분이 좋은 거라면 긍정적인 효과가 생긴다. 하지만 부정적인 기분을 드러내는 데에 더욱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특히 막장 드라마 같은 경우엔 심하다.
자기 기분을 드러내고 그걸 알아달라고 하는 게 대화가 아닐까 한다. 대화의 속살을 파헤쳐보면 자기 푸념인 경우가 많다.
지난 주말부터 내 목소리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아직은 쉰 목소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정도는 된다. 내 의사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것, 이는 마치 아기가 말을 처음 배워서 하는 것처럼 신선한 과정이다. 새 목소리로 새말을 시작하면 달라져야겠다. 이젠 '푸념'말고 '대화'를 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