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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윤 Jun 26. 2023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 보상 소송의 전말 (1)


오늘 오전 사무실로 법원 등기가 하나 왔다. 우리한테 소송을 걸 거라며 내용 증명을 몇 번이나 보내온 고객이 있어 “그쪽에서 진짜 소송을 걸었나?” 하고 아빠 앞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봉투를 열었는데 원고와 피고 이름이 달랐다. 특히 피고 이름이 낯설기도 하고 낯익기도 했다. 작년 9월, 내가 Y씨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했고, 판결이 난 배상액이 너무 작아 얼마 전에 항소를 했는데 거기 관련된 서류가 온 것이었다. “아, 그거 아니네.” 하고 얼버무리려 했더니 아빠가 너에게 그거 말고 법원에서 서류 올 게 뭐 있냐고 다그쳐 물어보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 10개월이 지나고서야 나는 엄마와 아빠를 앞에 앉혀두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는 페친 중 여자 한 분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 여자분은 투자 관련 회사의 임원이었는데 저녁 약속이 이미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밤 9시쯤 이자카야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다리는 중 여자분에게서 한두 시간쯤 전에 연락이 와서 저녁을 함께 먹은 남자분들이랑 나와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가도 되냐 물었다. 나는 장난스레 남자들이 미혼이냐고 물어봤고 미혼에 잘 나가는 회사 대표들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기꺼이 좋다고 했다. 


다만, 세 사람이 모두 그렇게 만취해서 나를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 여자분은 그나마 좀 괜찮아 보였지만 혀는 잔뜩 꼬인 상태였고 남자 둘은 정말로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안 될 정도로 만취해 있었다. 남자 Y씨는 특히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취했는데도 계속해서 술을 마시려고 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언짢았다. 처음 보는 사이에 이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취한 사람들을 이미 만난 이상 혈중 알코올 진도를 맞춰줄 수도 없고 나 혼자 맨 정신인 것도 싫었다. 당황스러운 상태에서 음식과 술을 시키면서 나는 여자분에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저 분과 인사하러 온 거니까, 한두 시간 적당히 앉아있다가 자리를 파하자고 하자고 생각했다. 


맛있는 사케를 홀짝홀짝 마셨지만 술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술맛이 안 난다며 아예 소주를 시켰다. 걱정이 돼서 몇 번 말리기도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반쯤 꼬인 혀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업계 얘기를 듣는 건 나름 재밌었다. 보아하니 여자분이 투자 회사에서 일하는 분이라,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둘이 여자분에게 잘 보여야 하는 위치였다. 남자 둘 다 사무실이나 집이 전부 내 사무실과 가까워서 반가웠고 그래서 가끔 연락하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에 명함도 교환을 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 한 분이 여자분에게 조금씩 플러팅을 하는데 여자분도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이 엮여서인지, 내가 진짜 매력적이어서인지, 또는 취해서 그냥 습관처럼 그러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 Y씨도 나에게 슬쩍슬쩍 호감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놓고 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분이 싫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분은 오늘의 만남을 기억이나 할까 싶을 정도로 만취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명함을 주고받는 것 이상의 호감 표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얘기해요, 느낌이랄까. 그렇게 은은하게 훈훈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는데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은 후에 갑자기 일이 터졌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Y씨가 나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소윤 씨와 떡 치고 싶어요.”


나는 취하려다만 술이 확 깼다. 다른 두 사람도 황당해 보였다. 처음엔 그 사람을 이해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저기, 그거 혹시 칭찬이라고 한 거예요? 저는 전혀 기분 좋지 않거든요. 방금 제게 성희롱하신 거, 아세요? “ 처음에 그 사람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다 우리가 모두 그만 파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른 남자 일행이 그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와서야 그 사람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구나 깨닫는 눈치였다. 


내가 제일 기분이 나빴던 건 그 사람이 자신이 뭔가 잘못을 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내게 사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갑인 투자 회사 임원인 여자분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내게는 고개만 까딱일 뿐 여자분에게 사과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내게 성희롱을 해서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깨서 죄송하다는 식의 사과였던 것이다. 여자분은 서둘러 나를 그 남자에게서 떨어지게 하고 가장 먼저 온 택시에 나를 태웠다. 


집에 오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Y씨였다. 내가 준 명함을 보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사과라도 하려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술을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이 잘못한 걸 모르는구나, 싶어서 욕을 참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전날 밤 일이 떠올랐다. 분하고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제 입은 원피스가 야해 보였나? 아니면 대화 중에 내가 ‘솔직한 편’이라고 해서 가벼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나? 어제 그 말을 듣고 뺨이라도 때려줄 걸 그랬나? 한 동네에서 일하는 사이기에 당연히 사과 문자가 올 줄 알고 기다렸지만 오후 늦게까지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참다못해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만취해서 그런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사과 몇 마디 듣는다고 풀릴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의문들이 너무 많이 떠올랐고 대부분이 자책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명확한 해명과 사과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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