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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애 일기 2

by 김소윤

J는 무색무취의 인간이었다. 이준석을 모른다는 건 정치에 관심 없다는 것과 동시에 각종 우익 커뮤니티와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주긴 했지만 정치적 스탠스 외에도 그는 취미도 고집도 없는 흰 도화지 같은 남자였다. 주말에 뭐 하냐고 물으면 잔다고 하고, 남는 시간에는 게임 외엔 특별한 취미가 없다고 했다. 뭘 하자거나 먹자거나 가자고 하면 항상 긍정했다. 취향조차 없는 남자인가 했는데 그것보다는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내세워 남을 상하게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일 많고 불안할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J는 언뜻 괜찮은 선택지로도 보였다. 친구들의 반은 내가 J에게 금방 질릴 것 같다고 말했고 친구들의 반은 그 하얀 캔버스 네가 색칠하면 되지 않냐고 말했다. 처음으로 부산에서 속한 와인 동아리에서 뜻밖의 인연으로 다른 관계들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와 동시에 J를 알아가는 내내 나는 내내 날이 서 있었다.


J는 아직도 처음에 그가 나에게 ‘귀엽다 ‘고 했을 때 내가 발끈한 것을 두고 놀린다. 귀엽다는 말은 상대방을 한 수 아래로 보고 하는 말 아니냐며 정색했던 과거의 내 반응을 지금의 내게 슬쩍 돌려준다. 피곤하다는 내 말에 집 앞에서 잠깐이라도 보면 안 되냐는 그의 제안을 듣고 혹시 스토커 기질이 있는 건 아닌지 이곳저곳 물어보곤 했던 일에 대해서도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당시 나는 정말로 무서웠다. 가스라이팅과 안전 이별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은 이 사회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안전한 사람인지 분명히 알아야 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변태적인 성향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겉으로만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는 건 아닌지 알아야 했다.


J를 알게 된 지 고작 일 년 반이 지났다. 한 인간을 잘 안다고 하기는 영원히 힘들겠지만 얼마 전, 그가 평생을 통틀어 요즘이 가장 이해받는 기분이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벅찼다. 내가 아는 분명한 J의 장점은 꼬인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 사랑 많이 받고 자라 자격지심이 없다는 것. 꼬일 데로 꼬인 내가 별 거 아닌 걸로 트집을 잡아도 J는 현명하게 상황을 풀어나갈 줄 안다. J는 무던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무색무취가 아니라 자신의 냄새를 잘 숨길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남편이 된 J의 미세한 얼굴 표정을 보면서 이거 마음에 안 드는구나? 하고 웃고,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그의 눈웃음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 안다.


내가 J와 있었던 별 것도 아닌 일을 조잘거릴 때면 엄마가 물었다. J가 그렇게 재밌어? 상견례 자리에서 J의 누나는 자신의 동생의 어디가 좋냐고 물었다. 나는 나만 아는 J가 정말 재밌고, 내 불안을 잡아줄 정도로 변함없는 그의 마음이 좋다. 무던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그와 날카롭고 뾰족한 내가 그다지 싸우지도 않고 같이 잘 사는 이유가 사실 그가 정말로 섬세해서 그만큼 예민한 나를 배려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면서도 본인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다정함은 지능이라지 않나. 그는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다.


아직 그와 만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고 결혼한 지는 벌써 6개월이 되었다는 게 놀랍다. 우리는 어젯밤에도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가 다시 뒤돌아 편한 자세로 자는 것을 반복했다.


다음 편부터 J를 남편이라고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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