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 대한 항의
페미니스트란 여성과 남성과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의 신혼 일기"라고 대문짝하게 제목을 달긴 했지만 내가 페미니스트로써 특별한 활동을 하는 건 아니기에 조금 자세히 서두를 단다. 나는 다만 인권과 평등의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하고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여성 단체에 달마다 조금이나마 기부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진보적인 정당에 투표를 한다. 가부장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자들을 꼴페미 등으로 짓밟으려는 남자들이 생기면서부터 나는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왔다. 대단한 활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여성과 남성이 차별 없이 대우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인 것이다.
자칭 시인이자 서점을 운영하던 남자에게 전쟁 난민 수용에 반대한다는 말을 듣고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몇 년 뒤 부산에서 꽤 이름 알려진 독서 모임을 운영하는 남자에게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변형돼서 별로"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내 선택지는 부쩍 좁아졌다. 대단한 인권 의식이 있는 사람과 데이트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다만 내 손으로 직접 뽑은 부산 시장 오거돈이 성추문으로 얼룩졌을 때 내가 느꼈던 좌절감과 비통함을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친구에게 느꼈던 더한 절망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그 남자들에 대한 항의이자 반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지금의 남편인 J와 데이트 했을 때 나는 식사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저는 무슨 책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근데 그게 뭐냐면..." 이라고 내 자신을 설명했어야 했다. 당시 J는 이준석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정치에 관심없는, 아니 세상 밖에 별 관심이 없는 남자와 다시 데이트 할 일은 없겠다 생각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다다다닥 내뱉고 첫번째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했을 법한 상황 이후에도 이 남자는 꾸준히 내게 호감을 표했다. 심지어 내가 추천해주는 책이나 칼럼들을 읽겠다고도 했다. 처음 빌려준 책들은 '말이 칼이 될 때', '한국, 남자' 같은 책들이었다. 원래 책은 거의 읽지 않는다는 J는 내가 빌려주는 책들을 한달에 한 권 정도 느리지만 꾸준히 읽기 시작했고 1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몸 좋은 남자가 좋다는 말에 당장 헬스장을 끊더니 지금은 당시보다 10kg를 증량해 보기 좋은 몸매를 유지하는 중이다. 한 두달 가고 말겠지 했던 작지만 어려운 약속들을 꾸준히 이어가는 남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남자라면 결혼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