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생일 등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나는 책을 자주 선물 받았다. 앞표지에는 늘 짧은 메모가 있었는데 딸의 어떠한 시간을 축복한다는 한결같은 메시지였다. 중2부터는 선물이 왜 매번 책이냐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는 선물을 받아도 표지를 읽지 않고 책장에 빳빳한 새 책 그대로 꽂아놓기만 했다. 일종의 반항이었다. 책을 너무 읽고 싶을 때는 보란 듯이 도서관으로 가서 읽었고 심지어 엄마가 사준 책 대신에 학교 도서관에서 대여해 읽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묵묵히 책을 사주셨다. 고1 교복을 맞추고 집에 오니 세계문학전집 100선이 책상 옆에 쌓여있었다. 두껍고 높은 책을 보자마자 “이게 뭐야?”라고 말했고 엄마는 “이게 뭐긴? 책이지.”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인상을 쓰면 화난 척하는 반달가슴곰처럼 보인다는 내 특유의 표정을 자주 따라 하곤 했는데 그날도 내 얼굴을 바라보며 표정을 따라 해 보이곤 웃었다.
“ 참 좋은 선물이지?”
“ 엑! ”
마른 수건을 가져와 책 표지를 한 권 한 권 깨끗하게 닦아서 방 책장에 정성스럽게도 꽂아놓던 아빠. 아빠는 아직도 내가 그 책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했을까.
그날은 새 책들이 노끈으로 다시 묶여있던 게 이상하다 싶었다. 알고 보니 앞표지마다 짧은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박스를 뜯어 책을 꺼내 다시 묶었다는 것을 나는 40살, 세계문학전집을 지금 나의 집으로 가지고 왔을 때 알게 됐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소름이었고, 20년 넘게 그 책을 펴보지 않았다는 것은 더 소름이었다. 내가 그 책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더니 엄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짐 하나 줄어 속 시원하다고 말했다. 세월 때문에 책이 누렇게 변했지만 아직 펴보지 않은 책은 너무나 정갈한 자태 그대로였다. 현관에 세워진 책들은 꼭 누런 인견을 입은 선비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빳빳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찰스디킨스, 오헨리, 제인 오스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샬럿 브론테, 서머싯 몸, 펄 벅, 토머스 하디까지.. 찬찬히 작가의 이름을 살피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사 온 책을 그렇게나 거부하면서도 엄마의 수다 속에 드문드문 파고들어 있던 이름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아무도 관심 있게 바라봐주지 않았을 뿐, 엄마는 엄마로 살면서도 여전히 문학소녀였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 한편에 아직 못다 이룬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어렴풋이 느꼈으면서도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엄마”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엄마, 뭐든 해봐.
-여전히 엄만 문학소녀 같아.
-겁 없이 하고 싶은 것 다 해 엄마.
엄마라는 단어에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었을까. 꿈이라는 단어는 10대, 20대에만 찬란한 줄 알았다. 인간이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슬픔은 아마 마음이 늙지 않는 것 아닐까. 몸이 늙어가도 마음은 20대 청춘 그대로니 변하는 몸이 얼마나 서글플 것인가.
어른인 척,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며 살아가다 슬금슬금 고개를 내미는 사랑이나, 꿈, 배움의 열정 때문에 다시 알게 된다. 내 마음이 아직 젊음 그 시간에 있다는 걸.
모든 쉽게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더 간절해진다.
일을 그만 둘 때는 아이와의 시간이 절실해 간절했고,
아이를 돌보는 시간 속에서 문득 일 하던 시간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모순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고뇌는 반복적으로 날 괴롭혔고 나는 그때마다 다양한 책에 고개를 묻고 위로받고 싶었다.
“이런 여유 얼마만이야. 행복하다.”
행복을 입으로 일부러 내뱉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소리 내서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곤 했다.
“ 아 오늘 기분 이상하다. 계절 탓인가? 나만 그런 거 아냐. 다 그렇다! 괜찮아!”
이런 마음의 위로들도 설거지를 하면서 일부러 소리 내서 말했다. 꿈과 나이는 연도 표처럼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함수그래프처럼 쌍곡선이 될 수 있다.
22살에 작은 방송국 리포터로 첫 사회생활은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우연히 얻은 기회였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연습 삼아 시작한 리포터일은 꽤 흥미로웠다. 엄마는 방송시간에 맞춰 새벽 3시에 화장을 하는 나를 발견하면 눈썹을 조금 더 진하게 그리는 게 좋겠다. 오늘 목소리 상태가 별로니 따뜻한 생강차를 조금 담아주겠다 등 매니저처럼 행동했다. 엄마는 소싯적 웅변하면 엄마! 였다는 말을 하면서 적당한 제스처를 쓰는 방법까지 알려주곤 했는데 정말 신기하게 카메라 앞에서 엄마가 알려주던 방법들을 쓰면 감독님들에게 자연스러웠다고 칭찬을 받았다. 리포터 일은 꽤나 흥미롭고 체력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요하는 일이었다.
긴 시간 이동해 지방의 시장이나 명소를 찾아 즉흥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다른 것보다 맛있게 먹지 못한다면서 가장 많이 혼났다. 입이 짧은 나의 식성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짜여진 대본이 없고, 즉흥적으로 재치를 발휘해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고, 재치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것 역시 내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이라 생각한다.
맛있게 먹지는 못하지만 빠르게 생각해 행동할 수 있는 장점이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나오는 모든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니터링해주었다. 엄마는 특히 발음을 유심히 들어 어색하게 들리는 발음들을 종이에 적어놓고 건네주곤 했다.
“ 잘했거든?”
하고 말하면
“ 알거든? 한 번 돌려서 살펴봐.”라고 웃었고 정말 엄마는 귀신같이 부정확한 발음이나 전달이 모호한 단어를 족집게처럼 찾아냈다. 엄마의 꼼꼼함과 나에 대한 애증의 집착 덕에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족 중 유일하게 방송에 얼굴을 내비친 나였으니 친척들은 이런저런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그 연예인 얼굴이 정말 작냐, 성형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면 콧구멍 안이 다 보인다던데 정말 보니 그렇더냐..
나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까지 죄다 물어보는 질문 속에 깊이 있는 질문은 단 한 가지도 없었기에 나는 글쎄 몰라.라는 단답형으로 무 자르듯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참 이상한 집단이다. 응원을 하면서 상처를 준다.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보다 날 더 잘 모르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니.
언제까지 리포터를 할 것이냐, 아나운서로 전향을 할 수 있냐, 급여가 적다고 하던데.. 차별이 심하지 않냐.. 언제 잘릴지 모르니 다른 것도 같이 준비해야 한다 같은 말로 작은 돌 하나씩을 꼭 함께 던졌다. 때론 유전이다, 같은 피 맞네! 같은 진부한 말들로 추켜세우는 듯한 칭찬을 했다. 잘 들어보면 칭찬이라 하기도 애매한 말들이긴 했지만.
“ 안 떨리니 카메라 앞에서? 역시 엄마 피는 엄마 피다.” 친척들은 마이크 하나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햇병아리 같은 나를 보며 엄마의 피와 닮았다고 칭찬한다. 호탕하게 웃을 때도, 말을 할 때 몸동작을 조금 더 과장하며 사용할 때도,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할 때도 어김없이 엄마 피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나는 이런 “ 엄마랑 똑- 같다 정말.”이라는 말 때문에 자연스럽게 엄마를 더 관찰하게 되고 엄마의 과거를 추적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를 닮았다. 정말 엄마 어릴 때랑 어쩜 그리 똑같니.라는 말들은 나의 삶에도, 엄마의 삶에도 묵직한 시선이라는 걸 그들은 모르는 듯했다.
엄마를 닮은 것 같지만 막상 어디라고 말하기는 힘든 얼굴. 비슷하다고 말하기에는 내 기준에 너무 다른 선택을 하는 성격. 확연히 갈라져버리는 음식취향. 순식간에 엄마와의 차이점을 찾으라면 3가지 이상이 떠올랐다. 엄마의 삶이 우울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엄마와 닮은 나의 삶도 비슷하게 우울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5남 2녀. 나는 5남 2녀라는 소리를 들을 때 한 인간의 임신주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도대체 외할머니는 몇 년을 임신한 채로 살았던 것이며 배가 부른 채 무거운 몸으로 지낸 시간은 장작 몇 년이었던 것인가. 아이를 낳고 몸도 채 풀기 전에 어쩌면 저리 빨리 새 생명이 찾아왔을까. 엄마가 신나서 어린 시절 이야기 늘어놓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옛날에는 왜 저렇게 많이 낳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메스꺼운 속 때문에 생 레몬을 입에 물고 다니던 날들과, 배가 무거워 걸을 때마다 골반이 뒤틀릴 거 같은 고통을 느끼던 때가 떠올랐다. 내가 특히 힘들어했던 건 배가 커지면서 잠을 잘 때 편하게 숨 쉬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자면 자리가 불편한지 배가 뭉쳐 힘들었고, 천장을 보고 누우면 내 얼굴까지 이불로 누군가 덮고 있는 거 같은 답답함에 버거웠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을 엄마에게 한 적이 있다. 나의 임신기간을 추억할수록 외할머니의 ‘7남매’라는 숫자는 나에게 괴기스럽게 다가오기도 했고, 때론 슬프게 다가온 날도 있었다.
다들 효자 효녀였지만 작게 크게 할머니에게 생채기를 준 이모와 삼촌들 사이에 우리 엄마가 있다. 듣다 보면 어린 시절‘만’ 행복했던 것 같아 그 추억을 씹고 씹고 또 곱씹으면서까지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사라진 동네 개울가, 집 앞마당에 있던 커다란 대추나무가 지금 60이 넘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 나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동네 이야기를 하다가 노선을 변경해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무섭다고 소문난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전국 웅변대회에 엄마가 나가야 한다고 해서 전교생에서 엄마 혼자 데리고 서울까지 웅변대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웅변대회에 나가기 전까지 운동장에서, 구령대에서, 뒷산 언덕에서 국어 시간마다 나와서 웅변 한 번 해봐라! 하며 멍석을 깔아줬는데 그때 조금이라도 우물쭈물하면 기다란 나무막대기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 작은 무대에서도 벌벌 떠는데 어찌 큰 물로 나갈 수 있겠나! 소리를 쳤다고 했다.
서울은 어쩌면 엄마가 처음 접한 큰 물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눈이 워낙 동그랗고 새까만 까만 콩처럼 피부에 윤기가 나 서울 사람들은 엄마를 까만 콩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 난 그럼 누구 닮은 거야?”
신나서 얘기하는 엄마의 말을 끊고 불쑥 물었다.
“ 넌 내 얼굴은 아니지. 선이 얇잖아. 아빠 선이야 넌.”
어딜 가나 엄마를 닮았다고 듣게 되는 건 아마도 얼굴 때문이 아닌 말투와 행동 때문이라고 엄마는 매섭게 단정 지었다.
“ 엄마 귀엽다.”
흑백 사진. 내가 가장 좋아해 다이소에서 산 5천 원짜리 액자에 굳이 넣어 거실에다 올려둔 그 사진. 왜 이렇게 그 사진이 좋은지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굵게 웨이브 진 엄마의 머리가 어깨 즈음에서 바람에 날려 우아함을 내뿜는 순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그 사람을 나는 애정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사진을 있게 한 장본인이니까. 아빠의 인생을 위해 엄마의 인생을 갈고 또 갈아 넣으려는 듯한 엄마를 보면서, 딸의 인생을 위해 딸의 아이를 위해 남은 인생을 다시 탈탈 털어 갈아 넣으려는 엄마를 보면서 난 ‘엄마’라는 사람의 시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엄마가 처음 접한 서울보다 큰 세상은 아마 아빠가 아니었을까. 흑백사진 속 윤기 나는 피부의 까만 콩 아가씨가 날 보며 웃는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젊다, 싱그럽다 등등 여러 단어들을 떠올려봤지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건강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행복하지요 지금도. 더 그럴게.”
엄마가 행복하면 나도 더 행복하게 나이들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잠시 아이에게 집중하고 돌아가려 했던 나의 야무진 계획은 둘째 임신으로 잠정 퇴직이 되었다. 서우는 늘 나를 배고프게 만드는 신기한 아이였다. 입덧도 한 번 없었다. 서아 손을 잡고 걸어가면 어르신들은 “엄마 배를 보니 동생도 딸이네?”라고 말했다. 딸 배는 어떤 것일까. 그들의 인생 짬밥을 믿고 딸이라고 확신해도 되는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입이 짧은 나였지만 서우를 가진 기간 동안 나는 평생 먹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가장 많이 먹었다고 자부한다. 덕분에 서우는 건강한 아이로 세상에 나왔고 나는 예전보다 먹성 좋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회사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바쁜 시즌에는 빠르게 일 처리를 할 수 있는 노련미를 지닌 경력자가 소중한 존재다. 몇 년 동안 같은 업무를 해온 나였으니 어쩌면 지금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엄마의 일들’ 보다는 ‘회사의 일들’이었을지 모른다.
통화를 할 때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마무리하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회사에서 부르면 거절하지 말고 가서 일하면 되지.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회사에 가면 괜히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어질 것 같아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고속철도처럼 흘러갔다. 퇴직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나를 찾는 전화도 오지 않았다. 단념하게 되니 차라리 기대가 없어져 편안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간 시간 구직사이트를 돌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구나 안심하기도 했고 나이제한을 확인하고 씨발 욕을 한 적도 있다. 때론 슬쩍 전화를 걸어 파트타임은 어느 정도 돈을 받냐고 물어보니 대뜸 계약기간은 주 단위라는 어이없는 대답에 욕을 할 뻔한 적도 있다.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결여된 시장이었다.
틈틈이 내가 할 수 있는 업무를 서칭 하고, 서점에서 신간 잡지를 살펴보며 기획자 이름을 확인해 보는 일은 돈 안되지만 가치있는 일이었다. 아직 연수라는 이름이 쓰일 수 있는 희망이 깃든 행위었으니까. 매일 한 장씩 글도 썼다. 회사에서 보고나 프레젠테이션으로 단련된 글 솜씨를 하루를 정리하면서 다시 풀어 본 것이다. 글 쓰는 행위는 때론 허공에 떠다니는 불안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드는 명약이었다.
위경련이 날 때도, 두통이 심할 때도, 배가 싸르르하며 아픈 대장증후군 일 때도 노트북을 켜 [소중한 박연수]라는 폴더를 열어 한글 파일을 열면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말로 내뱉는 발산의 시간을 글 쓰는 응축의 시간으로 바꾸며 나는 삶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즐거움 때문에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바로잡으려고 애쓰기 위해 했던 책 읽기나 글쓰기는 분명 내 삶에서 즐거움이 됐다.
큰 아이 서아가 중학생이‘ 되면서 하루의 시간이 조금은 다르게 흘러갔다. 아이는 아이의 시간을 배워가는 중이었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인 그런 시기.
내가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아이들은 한 발짝 물러섰다. 거리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아직 둘째에게는 손이 갈 일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크니 자연스럽게 이제 일을 마음 놓고 해도 되는 시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무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라 정확히 내가 추구하는 인생이 무엇일까 혼란스러울 겨를도 없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보다는 확실히 잦아진 생각임은 분명했다.
“ 엄마 일 다시 할까? 엄마 야근하면 싫겠지?”
서아는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 엄마 마음대로 -”라고 짧게 말했고 서우는 매달리며 “ 힝 엄마 – 늦게 와야 하는 거야?”라고 질문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틀렸다고 스스로 웃으며 고개를 젓기도 했고 심각하게 남편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괜히 날이 서 다투게 된 날도 있었다.
“ 그럼 아이들은?”
“애들 어릴 때는 엄마 도움 받았고, 이제 내가 일 그만두고 이만큼 사람 만들어 놨고, 그럼 뭐 언제까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아니 그럼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건데.”
목소리가 조금 커지면 서아는 문을 꾹 눌러 닫았고 우리의 대화는 늘 그쯤에서 스톱되어버리곤 했다.
알고 있었다. 누구의 탓도, 누구의 일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떠한 결정 앞에 더 쉽게 무너져버리는 건 항상 엄마인 나였던 것을.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다가도 항상 나만 왜 이런 결정에서 힘없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해지지 않는 그런 날에는 남편의 회사 가방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회식이나 워크숍 같은 회사의 일정들을 나도 경험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사회생활이라는 것도 다 안다. 그럼에도 가끔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풀이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이었다. 엄마가 하는 모든 집안일들은 당연한 노동인가. 경제적인 가치로 판단하기 어려운 고결한 영역인가. 하는 마음에 서글퍼지기도 했던 걸 솔직하게 인정하겠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과, 반복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을 곱씹으며 아이들은 컸고 시간은 쉼 없이 지나가버렸다.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의 관심사는 아이돌과, 친구였다. 친구랑 전화할 때 가장 밝은 표정이 되고, 좋아하는 아이돌 정보가 눈빛을 반짝이게 했다. 조금 차가워지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 알아서 잘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BTS에 빠져 온 방을 정국 사진으로 도배를 했지만 당연한 시간이라고 받아들인다. 아이들의 모든 성장과정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열혈 지지가 한 스푼씩 더해졌다.
“ 아이들대로 다 자기 기질이 있다. 물 흘러가듯 내버려 둬라.”
“ 건강하게 이만큼 커준 것도 복이다. 행복하게 해 줘라.”
“ 잔소리할 거 하나 없다. 너 어릴 때보다 천 배는 낫다.”
“ 성깔 얘기 꺼내지도 말아라. 요즘 세상 고정도 성깔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냐.”
“ 다 너 닮은 거지 어디 안 간다.”
“ 똑같이 다루지 말아라. 첫째 다르고 둘째 다르다.”
“ 애들 잘못 하나 없다.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부부 잘못이다.”
애들 고민이라도 하나 얘기하려 시동을 걸면 갑자기 애들 곁 호위무사처럼 버텨 혼낼 필요가 없는 백 한 가지 이유를 꺼내는 엄마에게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애들 잘 키우는 게 부모의 업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때로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너무 다행이라 말로 또 급하게 주제를 변경하기도 했는데 내가 아이를 한 명 더 낳을까 봐 피임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었다.
“ 아 피임은 꼭 해야 해. 셋은 힘들다.”
“ 뭐래~ 딸한테 무슨 피임 얘기를 정통으로 해?”
“ 콘돔은 꼭 쓰고.”
“ 아, 좀...”
아무리 질색해도 둘까지는 잘 키워보라는 엄마의 행동이 때론 과하다 싶었다. 엄마 동창 중에 아이를 넷 낳은 친구가 있는데 다 키워놓았더니만 이제 차례대로 순주 보느라 결국 허리 다 무너져 디스크 수술하고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고 미간 주름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저 시골 옆집 살던 누구누구는 아이 둘 낳을 때는 그래도 몸이 성하더니만 막내 한 명 더 낳고 나니 갑자기 10년은 나이 들어 보여 깜짝 놀랐다는 얘기도 했다. 늘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엄마의 화법이었다. 엄마 딸 마흔 넘었다! 하고 말하면 “네가 힘들까 봐 그렇지.”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가 손이 두 개인 이유가 있다고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나는 괜히 그런 소리 자체가 듣기 싫어서 그럼 손 없는 사람은 애도 못 키워!? 하고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 아휴 성질은.”
나도 셋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아기 띠를 매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온 관절이 다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려고 책장 책들을 모두 빼 쌓아 놨다. 책들이 많아 책장 한 칸에 두 줄씩 책들을 꽂아 놨는데 안에서는 아이들 어릴 때 읽던 육아서도 몇 권 남아있었다. 눈에 들어온 빨간색 인덱스를 손으로 잡아 펼쳐봤다.
아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짧지만 강렬한 느낌이 들어 인덱스를 붙여놓고 곱씹었을 것이다. 엄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노력들이 고스란히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책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지곤 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내가 주방에서, 거실에서, 아이들의 곁에서 늘 함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현명한 것인가. 아이들을 위해 엄마의 일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커리어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인가.
아직도 그것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선택이든 그들만의 이유와 그들만의 깊이가 존재함을 알기에 나는 그 육아서를 덮으며 작게 속삭였다.
“ 그래요. 그렇지요. 말이 쉽지요. ”
둘째가 하교할 시간이 다가오자 병에 얼마 남지 않은 매실 액을 컵에 담아 적당히 물을 넣고 얼음 3알을 넣어뒀다.
아마 들어오자마자 매실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엄지를 올려 보일 테니 말이다. 매실 진액은 아이들이 너무 잘 먹는 음료다. 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매실 액에다 물을 넣고 얼음까지 동동 띄어 야무지게 몇 번을 타먹는다. 당 때문에 너무 많이 먹지는 말라고 하지만 아이스크림대신 매실액을 찾는 아이들이니 말릴 이유도 딱히 없었다. 속이 안 좋아도 매실, 기분이 안 좋아도 매실, 기분이 좋아도 매실, 더워도 매실인 아이들은 할머니 음식에 유난히 애정이 많았다. 그 음식에 대한 귀한 추억은 엄마와 근처에 살아 어릴 때부터 누린 내 아이들의 호사였다 생각한다. 할머니가 해준 매실 액은 가게에서 파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아이들 말에 엄마는 매년 의식이라도 치루 듯이 가장 좋은 황 매실을 주문하고, 가장 좋은 유기농 설탕을 주문한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건다.
“ 연수야, 매실 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많은 매실 꼭지를 엄마 혼자 묵묵히 다 따 만들었다. 22살 매실 장아찌 맛집으로 리포팅을 나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매실 꼭지를 야무지게 따는 나를 보고 매실농장으로 스카우트를 해야겠다는 농담을 하신 사장님은 여전히 우리 집으로 매실을 보내는 진한 인연이 됐다. 한 자리에서 많은 양의 매실 꼭지를 따는 건 실험실에서 배양실험을 하는 것만큼 내 배를 살살 아프게 했다. 해마다 나는 바쁘다 말했지만 사실 핑계였다. 재작년 조금만 무리하면 손가락 관절이 바로 덧나 구부러지지 않는 엄마의 손을 보고 매실이며 김장이며 다 그만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엄마는 묵묵히 본인이 해야 할 일들이라며 주방을 사수했다. 엄마에게 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혁명이나 다름없구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돕는 게 낫다고 결론 내렸다.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 건 관절과 관절 사이에 윤활유가 없어져 생기는 증상이라는데 그만큼 손을 많이 썼다는 얘기였다. 병원에 가서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냐는 소리를 들었다며 신기해했다.
“ 신기할 일이야 그게? 슬픈 일이지? 좀 아껴 엄마.”
“ 아끼긴 엄마가 손 아끼면 어디에 쓰니.?
“ 참나...”
엄마의 오른쪽 검지 중지 손가락은 한번 구부러지면 왼손으로 힘을 줘 펴야만 곧게 펴졌다. 뚝 소리가 나면서 펴지는 손을 부여잡고 악 소리를 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관절이 부서지도록 집안일을 하며 살게 되는 것일까.
“엄마의 기쁨이야.”
매실 꼭지를 따며 엄마는 말했다. 그 기쁨이라는 말 한마디에 입을 닫았다.
“ 나 좀 봐. 엄마 닮아서 애들 이유식 시판으로 그렇게 잘 나오는데도 집에서 죽 만들어 먹여, 이유식 다 만들어 먹여.. 나도 엄마랑 똑 닮았네, 닮았어! 아휴!! 정말. 고생을 사서 하고 있잖아.”
“ 크크 그렇네. 그래도 그 힘으로 더 잘 클 테니 두고 봐라.”
주방에서의 시간, 아이들에게 내어주는 엄마의 밥... 모두 어미의 믿는 구석이었을 것이다.
나는 김장을 할 때도 매실이 오는 날도 그냥 엄마 곁에 앉아서 엄마의 기쁨이라는 그녀의 의지에 동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금붕어를 보던 서아에게 달려올 때처럼 이번에도 조금 늦은 합류였다는 것을 안다. 늘 뒤늦게 후회하고 깨닫지만 그럼에도 합류하는 박연수에게 난 조용히 지질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쑤시개 한 통을 앞에 두고 엄마의 반복되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꼭지 두 꼭지 매실 꼭지를 따다 보면 누군가의 눈에는 이 모습이 매년 보는 사진 같은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 같았다. 다음 날, 유튜브 영상 2개와 캡처한 메모장 한 개가 카톡으로 도착했다.
매실 장아찌 담그는 법, 매실의 효능, 매실액 맛있게 먹는 비율, 매실액 보관 법, 매실 액이 들어간 각종 요리 같은 것들이었다. 매실에 관련된 세상 모든 정보를 낱낱이 다 전해주겠다는 엄마의 의지는 내 경험상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마무리될 것이다. 엄마는 책과 글, 그리고 수영을 사랑하는 여자다. 수영은 엄마의 몸이 너무 아파 시작했는데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수영장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탄탄한 물개 같았다.
“ 엄마, 검은콩에서 이제 검은 물개가 된 거야?”
라고 웃으며 말하면
“ 검은콩보단 검은 인어가 낮지 않니? 뭐라도 큰 게 낫지.”
라며 웃었다. 동네 체육관 오픈 기념식으로 진행한 한 달 무료 이벤트에 엄마와 엄마의 동네 친구들은 우르르 등록해서 함께 수영복을 사고 수영을 하러 다녔다.
월. 수. 금 10시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누릴 수 있는 엄마들의 자유 시간이었을 것이다. 10명 남짓한 친구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수영장에 남은 건 엄마가 유일했다. 그렇게 엄마는 30년 가까이 꾸준히 수영을 했다.(해냈다)
꾸준하게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인내가 필요한 일이며, 얼마나 담담하게 스스로를 토닥여야 하는 일인가.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았던 나의 회사 경력만큼이나 엄마의 수영경력 역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엄마에게 말해줬어야 했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호흡부터 발차기까지, 자유형 팔 돌리기부터 쉬지 않고 한 바퀴 수영까지, 평영자세와 접영 웨이브, 자유형 팔 꺾기와 사이드 턴, 플립턴, 스타트까지 엄마는 묵묵함 하나로 버텼고 결국 동네 가장 오래된 체육센터에서 가장 오래 수영을 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됐다.
엄마에게 수영은 정말 각별했다. 모든 일정은 주 3회 가는 아침 수영을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듯 짜여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오전 수영 전에 근처 산책을 한 시간 하고 돌아온 뒤 수영을 할 때 배가 너무 부르면 숨 쉬기 힘드니 간단하게 달걀 2개를 먹고, 수영 가기 전 전신 스트레칭을 하고 수영 후 집에서 수영가방 정리 후 다음 날 자유 수영을 가기 위해 다시 수영가방을 정리하고, 저녁에는 그 다음날 수영을 가기 위해 너무 과한 저녁을 삼가고 간단히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잠을 잔다. 이 사이사이에 끼워 맞춰 들어가는 일정들도 엄마의 기준에서는 수영의 유무가 가장 큰 기준점일 것이다. 이런 엄마도 내가 서아와 동생 서우를 낳았을 때, 내 동생이 아이들을 낳았을 때, 내가 회사에서 일을 했을 때.. 수영 그거 뭐 중요하냐며 만사 제쳐두고 뛰어왔다.
“수영이 뭐 중하니 애들이 중하지.”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들이고 애쓰며 배워온 수영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안다. 그런 엄마가 자식의 매 순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잠시 멈춰두며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괜찮다고 말한다. 자식들의 삶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에너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 혼자 잘났다고, 내 인생이 더 중요하다며 모른 척하고 지금껏 살아온 것 아니었던가.
아이들이 침 흘리며 이유식 먹는, 하루 종일 누워 자기 발가락을 빨면서 옹알거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엄마의 하루를 과감히 포기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마음인지 나도 수영을 시작하며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수영을 등록했다.
흰머리가 30개쯤 보였을 때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나에게 준 선물 같은 거였다. 거울 앞 흰머리를 뽑다 말고 탈모가 되느니 운동이라도 시작해서 뭐든 리프레시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 여보, 나 지금 정신이 너무 건강하지 않아? 흰머리가 보이니 우울해서 명품을 지르는 게 아니라 수영을 등록하는 것 난 멋져.”
“ 응, 연수답다!”
리프레시 안에는 운동, 건강뿐 아니라 일과 가정이라는 끝나지 않는 고민의 단어도 포함돼 있었다.
흰머리를 핑계 삼아서라도 나는 지금 리프레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