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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jeong Kang Mar 09. 2016

비밀

날 꺼내 주세요

(2월 5일 출근길, Vanderbilt Gate, the entrance of Conservatory Garden in Central Park)


새해가 되었지만 아직 봄이 오기 전, 날씨가 하도 따뜻하기에 이른 봄이 올 건가 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라 우기고 싶었는지 지금은 눈이 펑펑 오고 있다. 금요일 밤부터 떨어지던 눈방울들이 토요일 오후가 되었는데도 그칠 줄 모른다. 우리 엄마는 나를 부지런한 어른으로 크길 원하셨겠지만, 독립한지 칠 년째, 불행하게도 나의 본성은 엄마의 훈육을 거스른다. 뭐 이리 귀찮은 게 많은지. 눈이 오면 '눈아 내려라 나는 내 할 일 하련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책도 읽다가 영화도 보다가 친구랑 전화도 하는데, 좀 지루해진다. 그러다 창가에 앉아서 한참 동안 밖을 바라다보는 중이다. 


우리 집 창가는 깊어서 방석을 깔고 앉아서는 몸으로 창문에 기대어 밖을 보는 게 나름 재미가 있다. 그런데 눈은 눈이다. 영하로 내려간 기온이니까 비 대신 눈이 오는 것이다. 창문에 기대어 있는 게 얼마나 추운지, 바깥에 나가는 것처럼 옷을 겹겹이 입는다. 그러다 엉덩이도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아서 전기방석까지 가져와 깔고 앉아서는 한창 밖을 바라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펑펑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로맨틱한 취향을 가졌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단지 창가에 앉아 창문으로 떨어지는 비나 눈을 보면, 차가운 수분과 얼어버린 수분이 나의 마음에 닿는 것 같아 촉촉해지는 그런 기분이 좋은 것이다. 따뜻한 내 마음에 닿으면 이내 녹아 따뜻한 수분이 되는, 즉 나는 비와 눈과 상부상조하는 나름 의미 있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이런 날씨에도 꽁꽁 싸매고 나와 그 펑펑 내리는 눈 밭을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앞 도로 곁에 세워둔 차에 눈이 계속 쌓여서 둥글둥글 차 봉분이 생길까 봐 눈이 오고 있는 중에도 열심히 눈을 치우는 사람들, 강아지처럼 들뜬 아이들이 썰매 타고 싶다고 얼마나 졸랐을까, 온 가족이 나와서 썰매랑 장난감 삽을 들고 두 블록 떨어진 센트럴파크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엄마야, 저게 뭐지 했다. 설마 유모차일까. 아마 눈 오는 게 너무 좋았던 부부가 그 어린아이를 굳이 굳이 유모차에 태워나온 것 같다. 지금 날씨는 눈 치우는 트럭과 앰뷸런스 말고는 어떤 차도 다니지 않고 있다. 그 정도의 날씨이다. 그런데 저들은 누구인가. 어쩌면 저토록 부지런하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난 관리해야 하는 차도 없고 키우는 아이도 없다. 가진 게 없으니 사랑하는 가족이 없으니 굳이 할 필요가 없다. 편하다. 부지런할 필요가 없다. 꽤 괜찮은 핑계인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진다. 에이. 귀찮은데. 그래도 왠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면 속상할 것 같다. 그래서 입고 있던 옷에 모자와 목도리로 빈틈없이 온몸을 덮고 두른다. 아파트 입구로 내려갔는데 이럴 수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밖으로 밀어야 열리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밖에서 눈을 치워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이러면 안 되잖아. 난 용기를 냈다고. 저 눈을 뚫고 슈퍼까지 뛰어갔다 오리라 용기를 냈었다. 그리고 나의 귀차니즘을 극복하는 의지까지 보였는데 이럴 수가. 집 밖을 나갈 수 없다니. 게다가 밖에서 날 꺼내 주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다시 집으로 올라와서는 차를 마시려고 물을 끓였다. 물이 끓었는데도 어떤 차를 마셔야 될지 모르겠다. 레몬 생강차, 민트차, 디톡스 차. 그렇지만 아이스크림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먹기 싫다. 그냥 다시 창가에 앉아서 내리는 눈을 본다. 그러고 보니 몇 대의 차는 눈을 그래도 계속 치워서 조금만 쌓였지만 어떤  차는 주인이 눈 내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지, 아니면 집에 없는 것인지, 눈이 한참 쌓여 차 위에 눈이 쌓였는지, 쓰레기 위에 눈이 쌓였는지 분간을 할 수 없도록 차를 방치하고 있다. 어떤 이는 유모차를 미는 건지 들고 걷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유모차는 눈 속에 박혀 빼느라 애를 먹는 것 같다. 유모차 안에 앉아있는 아이는 아마 응아응아 울고 있을 것이다. 눈썰매에 한창 신났던 아이는 코 찔찔 흘리며 얼굴이 시뻘걸 것이다. 그리고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흥. 나도 안다. 놀부 심보다. 


나도 안다. 사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나도 안다. 부럽다. 나도 내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차도, 가족도 이 차디찬 겨울 도시에는 없다. 이 눈 오는 날, 난 그렇게 아이스크림조차 없이 혼자 창가에 앉아 있다. 차에 대한 애정도 부럽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부럽다. 그래서 부지런해야지 마음먹어서 눈을 치우고 눈을 즐기러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것 하다 보니 부지런한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난 그냥 좋아하는 취미 같은 게 없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부지런해지는 간단한 비밀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지만 말이지, 누가 날 꺼내 주었으면 좋겠다. 눈이 온 세상을 덮었든, 눈이 녹아 없어지든 내가 날 꺼내고 싶지 않다. 누가 날 꺼내 주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잊어버리고 있던 오래된 취미이건 예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취미이건 재미있게 하고 있어야겠다. 그래야 가족이 생기면 같이 더 재미나게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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