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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jeong Kang Mar 22. 2016

흔적

내 장래희망은 과학자입니다

(Rembrandt,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holaes Tulp)

  

요즘도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방학마다 ‘탐구생활’이라는 것을 했다. '탐구생활'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걸 굳이 왜 아파트 베란다에서 했는지 모르겠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 새시 문틀에 걸터앉아서는 스케치북을 세로로 길게 잘랐다. 끝을 세모꼴로 잘랐다. 그 끝에서 1-2cm 위에 검은색 수성 사인펜으로 점을 찍었다. 반대편 끝을 테이프로 새시 문틀에 붙였다. 아마도 베란다 벽이 콘크리트라서 테이프가 잘 안 붙었던 것 같다. 새시는 플라스틱이었다. 사인펜 점에 물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처음 할 때는 종이를 너무 위에 붙였는지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도 그 끝이 수면에 닿지 않았다. 종이 끝 테이프를 문틀에서 떼면서 종이를 찢기도 하고, 또 겨우 제자리에 종이를 붙였다 싶었을 때에는 종이가 툭 물통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나서야 마침내 종이의 끝과 물통의 물 높이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물이 종이를 따라 흡수되면서 검은색 사인펜의 색소가 여러 가지 다른 색으로 분리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참 생소했지만 지금은 꽤 익숙한 ‘크로마토그래피’였다. 


탐구생활에 나와있는 대로 처음에는 검은색 사인펜으로 시작했다. 끝에서부터 물을 빨아들이고 있던 기다란 종이 위에는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 하늘색, 노란색, 점차 색들이 나뉘고 있었다. 난 분명 검은색 한 색깔만 찍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주황색, 초록색, 보라색… 그렇게 12색 사인펜을 다 찍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스케치북을 다시 세로로 길게 몇 장 더 잘랐다. 각 색깔 별로 종이에 찍어서 또 줄줄이 새시 유리문에 붙였다. 엄마, 물통! 그렇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씻은 긴 우유갑의 긴 면을 잘라 떼어 낸 뒤 물을 담아 갖다 주셨다. 그렇게 하니까 여러 개를 한 번에 담글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무슨 색으로 점을 찍었더라도 마지막으로 노란색이 나타나면 그 이후에는 다른 색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다 보니 수성펜 각각 다른 색깔을 위해 종이를 계속 길게 자르는 작업이 좀 지겨웠던 것 같다. 결국 마지막 5색 정도는 종이 한 장에 띄엄띄엄 찍고서는 물컵에 넣었는데, 잘못해서 5색 점들이 한꺼번에 물에 잠기고 말았다. 색소가 분리되기도 전에 그냥 그 색들이 종이 위에서 퍼지면서 섞였고, 그러고는 물속으로 그냥 퍼졌었다. 처음에는 망쳤다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었다. 그래도 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엄마는 처음에 검은색 점을 찍었던 종이가 마른 것을 보시고는, 문틀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떼내어 바로 '탐구생활' 안쪽에 붙여주셨다. 이로서 그 '탐구생활' 숙제는 잘 마무리되었다. 


검은색은 무채색이라고 한다. 색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검은색이 검은색이 아니다. 여러 가지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는 것이다. 검은색은 다른 말로 ‘모든 색’이다. 고로 진정한 유채색은 검은색이다. 그렇다면 색을 하나하나 다 섞어보면 어떻게 될까, 언제부터 검은색이 되는 걸까.  색을 세 가지쯤 섞기 시작하면 검은색이 되는 걸까? 가만, 흰색을 섞으면 회색이 되지 않나. 아마도 검은색은 흰색 없는 모든 색인가 보다. 아니면, 흰색은 색이 아니라고 한다면, 검은색은 모든 색이 된다. 흰색은 정말 무채색이기 때문이다.


5학년인가 6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외할머니 부부를 제외한 부산에 살고 있던 외가 가족들이 4박 5일인가 여름휴가를 같이 가기로 했었다. 지금이야 어른들끼리는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여행을 같이 가시지만 그 해 여름은 외삼촌네, 이모네, 우리 가족까지 꼬맹이들도 다 같이 가는 여행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새 학기부터 그토록 가고 싶던  그 해 여름과학교실이 정확히 같은 기간에 초량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왜 그 휴가 대신 과학교실이었을까. 왜 바나나보트가 아니라 스포이드와 잎맥 책갈피였을까. 부모님은 나를 남겨두고 두 동생만 데리고 여행을 떠나시는 게 사뭇 마음에 걸리셨을 테지만, 내가 가족들을 보낸 것이었다. 내가 남겨진 것이 아니라. 내 동생들이 나 때문에 바나나보트를 못 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난 자기주장이 강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무시무시한 여자아이였다. 나도 그때 바나나보트 못 타게 되었다고 엉엉 울었으면서도 과학교실 가겠다고 우겼다. 그해의 내 바나나보트는 과학교실이었다. 


벤치 위에는 기다란 유리관들과 알코올램프가 놓여있었다. 선생님은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여주셨다. 기다란 유리관의 양 끝을 잡고 유리관의 가운데 부분을 알코올램프의 불 위에 닿도록 가져갔다. 그 가운데 부분에 열이 고르게 닿도록 양끝을 잡고 돌리면서 조금씩 잡아당기면 그 부분이 늘어났다. 적당한 길이가 되면 조심히 벤치 위에 두고 식힌 뒤, 그 중심을 줄로 금을 그어 그곳에 적당한 힘을 주면 반이 잘렸다. 그러고 나서 잘린 곳의 반대쪽에 스포이드 고무를 달면 스포이드가 되었다. 우와, 내가 '스포이드'를 만들 줄이야. 유리관이 알코올램프 위에서 돌고 있을 때 그 끝을 빨리 잡아당기면 깔때기 모양처럼 공간이 좁아지는 부분들이 너무 빨리 좁아져서 끊어졌다. 모양은 둘째 치더라도 어떤 것은 아예 끊어진 끝이 막혀서 스포이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반대로 유리관 양쪽 끝을 너무 천천히 잡아당기면 알코올램프 불이 생각보다 뜨거워서 손을 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줄로 금을 그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너무 새게 그으면 바로 유리관이 부러져 버렸고, 반대로 너무 약하게 그은 뒤 똑하고 힘을 주면 그곳이 깨져 버렸다. ‘적당히’라는 말은 지금도 아주 어려운 말이다. 특히 요리할 때마다 매번 느낀다. 그렇지만 이 과학교실은 나에게 이 단어의 뜻을 굉장히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또 다른 수업 중에 기억나는 것은 ‘잎맥 책갈피’ 만들기였다. 그 학교 화단에 호랑가시나무가 유독 많았다. 호랑가시 나뭇잎은 다른 나뭇잎들보다 훨씬 두껍고 광택이 나고, 가시는 아니지만 뾰족뾰족한 잎 가장자리가 그 특징이다. 그중 몇 잎 따서 수산화나트륨 용액에 끓여 칫솔로 잎을 두드려 잎살을 걷어내고 잎맥만 남긴 채 과산화수소 용액에 넣으면 상아색으로 탈색되었다. 핀셋으로 잎자루를 잡고 붉은 염색약에 삼분의 일 정도 담그고 꺼낸 뒤 어느 정도 마르면, 다시 핀셋으로 잎의 반대 끝을 잡고 푸른 염색약에 반대 삼분의 일 정도 담그고 꺼내면, 잎은 붉은색, 상아색, 푸른색, 이렇게 세 가지 색을 가진 잎사귀가 되었다. 세 개쯤 만들어서는 책에 조심조심 잘 끼워서는 집으로 가져왔다. 그때 한창 연예인 사진이나 우표 같은 것을 수집하는 게 유행이었다. 보통 그런 것을 모을 때, 코팅지를 사서 내 손으로 눌러 코팅을 해서는, 어린이 버전의 액자 인양 벽에 붙여놓거나 책갈피처럼 사용했었다. 내가 만든 잎맥도 역시 코팅지 안으로 들어가 책갈피로 변신할 차례였다. 잎맥을 조심스럽게 코팅지 안에 넣고 덮은 뒤 살살 문질러 코팅을 하고 나서, 잎 크기따라 자르고 펀치로 구멍을 내고 끈을 달았다. 아 그럴듯한 책갈피가 되었다. 분명 고등학교까지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그 책갈피를 어디에 두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기억나는 것은 난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다는 것이다. 변화를 관찰하는 과정,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과정들을 무척 재미있어했다는 것이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자라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아이들의 과학적 사고력이나 창의력을 키우도록 돕는 일, 그러니까 어린이 과학잡지를 만든다거나, 내 조카들을 위해 우리 엄마 아빠가 내게 그러셨듯이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면 잘 하도록 도와주고 싶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줄 수 있도록, 내가 다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참는 것을 잘 하고 싶다. 나랑 같이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 하면, 난 얼마든지 같이 잎을 따러 다닐 것이며 같이 종이를 자를 것이다. 우유갑 100개도 잘라줄 수 있다. 실제로 실험실에서 십 년 이상 일하고 나니, 연구의 많은 부분, 특히 호기심이 많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질병의 종말에 대한 염원, 책임감 혹은 목표의식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 깊숙이 박혀 사라진 적이 없다. 난 사실 실험하는 과정을 재미있어했다. 내 손으로 만지고 보는,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의 데이터들을 보며 이렇게 저렇게 새롭게 해석하는데 흥미를 느꼈었다. 그런데 시니어 레벨의 연구자가 되어가면서 보니, 새로운 이론을 확립해 간다던가, 그 특정 질병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적잖이 놀랐다. 난 사실 세상만사 궁금한 게 많은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자연과 환경, 과학, 의학, 더 나아가 음악, 미술, 그런 것들 모두 내 호기심의 부분 부분들을 차지해왔다. 그중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이 과학이었나 의학이었나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에 대한 대상이 자꾸 달라진다. 요즘은 사람, 사람이 궁금하다.


내 오랜 친구가 오늘 SNS에 사진과 함께 글을 남겼다. 큰 아들의 참관수업을 갔는데 부모님들 앞에서 자녀들이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의 꿈이 과학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 나도 그랬지 그랬다. 내 친구는 회사원이고 그의 아내는 음악 선생님이다. 너 왜 갑자기 과학자가 되고 싶으니 묻고 싶어졌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도 회사원이셨고 엄마는 주부셨다. 내 친구의 아들은 왜 과학자가 되고 싶어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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