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jeong Kang Mar 10. 2016

사랑은 기억으로 잊혀지는 것이다

그녀가 그를 기억하는 방법

(Richard Bergh, Nordic Summer Evening)


또 전화가 왔다. 잊을만하면 오는 전화였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머리맡에 있는 휴대 전화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라는 말도 이제 필요 없었다. 목도 가다듬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이제 집에 들어가, 좀 자라고. 그렇지만 상대방은 물었다. 여보세요? 우리 딸? 엄마야. 오늘 김치 보냈는데 받았어? 갑자기 잠이 깬다. 엄마라고? 아마 새벽 두세 시 즈음이었을 것이다. 엄마 아직 안 자고 뭐해? 무슨 김치? 못 받았어. 보낸다고 안 그랬잖아. 이봐. 너는 낮에 전화하면 건성으로 받는 데니까. 이게 뭐니? 잠도 못 자고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너한테 전화하는 거잖아. 관리실에 물어봐. 너 김치 받았을 거야.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끊으셨다.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엄마라고? 맥이 풀린다. 잠이 확 깼다. 엄마라고?


몇 년 전이지 아마. 몇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새벽 두 세시 즈음이 되면 전화가 왔다. 매번 똑같은 이야기였다. 웨딩 샾 앞이란다. 소주를 세 병 즈음 마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매번 똑같이 대답했다. 이제 집에 들어가, 잘 자고. 그리곤 끊었다.


우린 끝났다. 난 널 잊었다. 언제부터인가 전화가 오지 않고 있었다. 안도했었다. 너도 날 잊고 있구나. 다행이다, 생각했었다. 엄마의 김치가 도착한 그 날, 그 목소리는 그가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구나. 다시 휴대 전화를 켰다. 최근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엄마가 맞았다. 그래. 내일 관리실에 들러야겠다. 밤새 김치는 쉰내가 날 거다. 엄마한테 미안하지만 버려야겠다. 버릴 거다. 그럴 것이다.


그는 애연가였다. 잠자는 시간, 수업 듣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이어 담배를 피웠다. 신기한 것은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거의 맡아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의 스킨로션의 향기였다. 내가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서 그 향기가 났었다. 나의 남자 사람 친구들에게서 나지 않는 그 만의 향기였다. 길에서도, 강의실에서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난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어도 그가 나의 공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은 자동적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 그를 사랑할 때였다. 


대부분 어린 연인이 그렇듯, 우린 헤어졌다. 사소한 말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 말싸움의 끝은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잡는 법이다. 그는 마음도 오빠였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헤어짐이라는 말의 무게를 모르는 철들지 못한 아이였다. 결국 우린 정말로 헤어졌다. 며칠 동안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좀 앓기는 했지만 곧 지나갔다. 난 어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디에서도 그 향기를 맡지 못했다. 그 향기는 그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익숙했던 그 향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끝이 났다. 그를 지운 것 같았다.


그 후로 시간이 좀 더 흘렀다. 새벽 두 시, 한 통의 전화가 온다. 남자의 목소리다. 술에 취한 목소리다. 웨딩 샾 앞이라고 한다. 소주를 세 병 즈음 마신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내 친구다. 내가 소개해 준 여자 친구와의 이별 후, 며칠 째 술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 이제 집에 들어가, 잘 자고.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 녀석은 다짜고짜 겨울 바다를 꼭 봐야겠다며 내일 당장 나오라고 한다. 내가 시작하게 해주었던 연애였으니 나보고 끝내게 해달라고 한다. 짜식, 애쓴다. 그래. 내일 지하철 역에서 봐. 지하철을 탄다. 평소에 말이 많은 녀석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창문에 비치는 그 아이 얼굴이 좀 낯설 줄 알았다. 그런데 그리 낯설지가 않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우리가 꽤 오랜 시간 친구였으니 이런저런 얼굴 많이 봐왔다. 한참을 가다 우리 앞에 자리가 난다. 난 앉는다. 그 녀석은 여전히 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근데 문득 기분 좋은 향기가 난다. 내가 오랜만에 바다 보러 가는 게 기분 좋은 것 같다. 괜히 이 녀석에게 미안하다. 나만 좋아서 미안. 그런데 누가 날 자꾸 보는 것 같다. 이 녀석이 날 보고 있나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 녀석은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다. 그러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내 눈을 의심했다고 이야기하면 너무 상투적일까. 좀 아저씨스러워졌지만 그 사람이다. 한참을 그렇게 본다.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기억난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난다. 그래. 우린 사랑했었다. 우린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그때 우리는 학생이었다. 서로를 지지하고 다독이는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있었고, 평생 그 전공으로 살지, 아니면 다른 꿈을 찾고 싶은지 고민하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졸업을 해도 우린 서로를 여전히 응원하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내가 자기만 바라봐 주었으면 했다. 내 꿈이 전업 주부이길 바랬다. 그렇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내 꿈은 이거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긴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꿈이 뭔지, 앞으로 뭐하며 살고 싶은지 충분히 고민하고 싶었다. 그가 가진 꿈의 울타리 안에서 내 미래가 움직여져 가는 것을, 내가 제한당하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 인생의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그를 설득했어야 했다. 그가 설득당해주지 않을지 몰라도 난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내 주장을 훅 던지고는 동의해주지 않으면 그냥 끝내자고 이야기하는 그런 어린아이였다. 그런 내가 성숙한 사랑을 할 리 없었다. 


시간이 훨씬 지나 그와 헤어졌던 것을 후회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전업주부의 삶이 어릴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이 들어가면서 깨달아가고 있다. 그도 나를 설득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나 자신을 알아가듯 그도 그 자신을 알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다음 역에서 그는 내렸다. 따라 내릴 뻔했다. 아니, 따라 내렸다. 그렇지만 곧 다시 지하철을 탔다. 이별 중인 내 친구에 대한 의리였던 것 같지는 않다. 헤어지자 했던 그 지난날처럼, 오늘도 우린 가는 길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잘 가, 인사하면 그 뿐이다. 이젠 이해시킬 것도, 설득할 것도 없는 그저 남이다. 비껴간 인연이다.


그때 그의 향기가 어떤 향기였을까. 그런데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그 화장품 브랜드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가 그 화장품을 다 쓰고 나면 똑같은 제품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다운 것이었다. 그것은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향기였던 것 같다. 피노키오가 부른 “내 사랑은” 같은 향기였던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욕심인 것 같다. 나의 오랜 친구도 창문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원한 우정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보고 싶다, 생각난다, 문득문득 그랬었는데,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더 시간이 흘러, 나의 오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옛사랑을 이야기할 날이 있을까.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을 것이다. 현재 내 연인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나의 연인과 함께 인생의 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고 설득하는데, 그리고 내 연인의 꿈과 삶에 대해 귀 기울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혹시 모른다, 그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될지도! 이렇게 농을 치듯 슬쩍슬쩍 소원을 담아 내 친구에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꿈도 더불어 이야기할 것이다. 원래 어떤 꿈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지, 현실 속의 삶은 그와 얼마나 같았는지 또는 달랐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 둘 다 처음에는 원래 전공이 싫다며 다른 일 해보겠다고 우겼지만 결국은 공부한 대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꿈과 직업이 동의어가 아니듯이, 언젠가는 현재 직업을 그만 두든, 또는 병행하든,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아마 그때가 와도 우린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린 친구니까. 


오늘도 나는 두리번거린다. 

혹시라도 네가 저만치서 성큼성큼 걸어올까 봐. 

난 숨 죽여 내 발소리를 줄이고는 

조용히 네 옆을 그냥 지나가진 않을 것이다. 

모른 척 지나가다오. 내 첫사랑아. 

내 기억 속에서만 머물 내 첫사랑아.

이전 01화 잘 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