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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20. 2023

지게

   


  사내로서 제법 성근 나이인 열한 살을 넘어 열두 살로 접어드는 그 해 느지막한 가을, 나는 처음 지게를 졌다. 비록 지게가 몸에 맞지 않아 동작이 뒤뚱거렸어도 사내대장부로서의 길이라 생각하니 천하를 얻은 것 같았다.

  지게를 질 수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 인정하는 징표였다. 요즘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운전대를 잡으면 사회인으로 대우가 달라지는 것처럼 지게는 상징성이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미지의 세계를 바라볼 때의 경이로움이랄까. 동네에 또래가 적어 늘 형들과 노는 바람에 그들의 영향으로 일찍 지게를 졌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늘 아래보다 위의 세상을 꿈꾸며 살고 싶어 했고, 내 또래가 하는 놀이나 행동 그 이상의 것을 하길 원했다.  

  지게 다루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지게를 지는 건지 업고 다니는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키 클 것을 생각해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사 입히는 것처럼, 지게 진 내 모습은 쇠똥구리가 기어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평 길에서는 어깨끈인 밀삐를 바투 잡으면 그럭저럭 질만 해도 산비탈을 내려오다 나무뿌리에 걸리거나 웅덩이에 빠지거나 하면 나뭇짐을 진 채로 몇 바퀴 구르기도 했다.  

  전기나 연탄 등 대체 연료가 없던 시절, 고주박을 해서 담이나 사랑채 벽에 쌓아놓는 집이 부러워 며칠간 그 일을 하기도 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 산에 올라 청솔가지를 꺾어 오기도 하고, 이리저리 바람 불어 흩뿌려진 나뭇잎을 갈퀴로 긁어모아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 마을에 인접한 산은 벌거숭이가 될 정도다 보니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동네 형들을 따라 찬밥 덩어리를 먹어가며 나무를 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해 겨울, 그날도 나는 나무를 하러 깊은 산에 올랐다. 때마침 면에서 밀주를 담가 먹는 집을 조사 나온다고 하여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덩치 큰 나무를 베면 벌금을 물린다, 술을 몰래 담가 먹어도 감방에 보낸다고 하며 겁을 주던 때였다. 요즘은 막걸리 먹고 싶으면 막걸리, 소주 먹고 싶으면 소주, 각자 취향에 맞게 먹을 수 있지만, 그때에는 술은커녕 땟거리도 부족한 시절이었다.

  단속반은 밀주 담가 먹는 집만 단속한 게 아니라 생나무를 베어 싸놓고 땔감으로 쓰던 집도 조사를 나왔다. 면에서 나온 단속반원을 상감이라 불렀는데, 그들이 동네에 나타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럴 때마다 나무하러 간 남편이나 자식들이 다치지 않도록 전통을 하려고 산에 사람을 올려 보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꼼짝없이 산에 갇혀 해 질 무렵에 내려와야 했다.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박 씨가 있었다. 그 당시 엄마는 꾀부리는 박 씨 때문에 시름 반 투정 반 골치 아파했다. 박 씨는 술을 무척 좋아했다. 술 반 되박 받아오면 술이 부족하다고 하고, 많이 먹는 날이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구들장이 닳도록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그런 박 씨였던지라 오전에 나무 한 짐 부려 놓으면 으레 막걸리를 퍼마시고는 사랑방에서 코를 드르렁거리고 농땡이를 치니 그런 화는 내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칠월칠석날이었다. 이날은 일꾼들의 생일 같은 날이다. 박 씨는 우리 집에서 한 마장 거리에 있는 동료를 찾아 거나하게 한잔하고는 동네를 휘돌며 노래 같지 않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곱사춤을 췄다. 그렇게 노는 것을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이러고 나면 기운이 달려 며칠이건 드러누웠다. 그러다가도 박 씨가 기분이 돌아서거나 신이 나는 날이면 남 두 몫 하고도 남을 정도로 일해 쉽사리 내치지 못했던 것 같다. 한 해 농사는 끝마치고 바꿔도 바꿔야지 하면서도 이태 동안 박 씨를 내보내지 않았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로서는 박 씨가 얄미운 게 사실이었다. 골을 부리면 비위를 맞춰 일하게 하고, 그런 행동이 지나치면 새경으로 쌀 닷 말을 더 줘 내보내야 할지 어머니는 늘 복잡한 셈법으로 박 씨를 대했던 것 같다.

  지게를 처음으로 지던 그해 겨울을 나고부터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지게에 바소쿠리를 얹어지고 도랑에서 고마리 풀을 베어 돼지우리에 넣어줬다. 부잣집으로 불리던 옆집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 둘레의 풀을 베는데 5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모내기 철에는 집집마다 어우리로 모를 심었는데, 아버지가 타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터라 주말에는 어머니 대신 모내기 지원을 나섰고, 어느 해에는 앞 논 둬 마지기에 상당하는 벼를 어머니와 단둘이 낫으로 베어 수확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지게를 짊어지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갔다. 지게에 얹은 나뭇짐과 곡식류와 가축 먹이에서 희미하게나마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였고, 지게의 짐을 늘려가면서 어른들이 하는 놀이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막걸리 반 주전자 정도를 마시고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수수를 거둬들이고 난 휑한 밭에서 퍼지게 잠들어 있다가 어스름한 밤까지 온 식구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드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잘못인지도 모른 체 동네 형들과 성냥갑이나 담배 개비를 걸고 육백, 민화투, 고스톱, 도리짓고땡 화투 놀이를 했다. 참외와 수박 서리를 하지 않나, 과수원에서 사과를 몰래 따 가지고 밭둑에 묻어놓고 먹다 들켜 혼쭐이 나기도 했다. 정월 보름이면 집집을 돌며 '밥 훔쳐 먹기'를 할 정도로 배고프던 시절, 닭장에 있던 그 귀한 닭까지 훔쳐내어 잡아먹지 앉나, 대낮임에도 어쩌자고 과수원에 기어 들어가 달콤한 사과 맛을 보려 했을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어떻게 하면 삶의 실타래를 풀까 고민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면 잘 살아온 게 아닐까. 아픈 시간을 슬픈 기억으로만 남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하면 고마운 일이 아닌가.  

  눈을 뜨고 보면 앞에 있는 것만 보이지만 눈을 감고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질주를 멈추고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지금, 지게의 높낮이가 맞지 않아 밀삐를 당겨 키 맞춤하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 시간에 있던 추억이 아른거리면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 온다. 유년의 시절을 보냈던 시골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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