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rus Oct 24. 2023

게으른 내가 해본 몇 가지 취미 #1

맞기 싫으면 뻗어라. 복싱.


시작.


일 외적으로는 상당히 게으른 편이다. MBTI가 ISFP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해두자.

아마 내 평생의 취미이자 특기 중 하나는 누워있기일 것이다. 가끔 주말 아침에 조기축구를 하고 거하게 점심을 드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취미 때문에 주말 아침잠을 포기할 수 있다니 말이다.

가만히 누워서 공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가 않는 나.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아직 마스크를 써야 했던 약 2년 전 겨울, 동생이 운동으로 복싱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내일 동네 복싱장에 찾아가 볼 예정이란다. 왜였을까 게으르고 출근 외에는 나가기 싫어했던 나는 동생에게 둘이 같이 등록하면 할인이 되는지를 물어보라고 했다.

코로나 기간, 합법적인 방콕살이 때문에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스스로를 위한 방어기제였을까, 배워보고 싶기도 하고 복싱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순간적인 결정은 내 인생에 흔치 않은 몇몇 순간 중 하나이다.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등록하면 어느 정도 할인을 해 준단다.


업무를 마치고 동생이 알려준 복싱장을 검색해 본다. 생각보다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게 나는 많이 어렵다. 특별한 이유를 말하기에는 나 스스로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조금 귀찮고 어색하겠지만 가서 시설도 보고 상담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 30분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무거운 첫 발거음을 옮겼다.

복싱장 앞. 다행인지 유리문으로 내부가 보였고 운동중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여니 가느다란 종소리가 울린다.  

어떻게 오셨냐는 관장님의 인상이 퍽 무섭다.


”운동 좀 배워보고 싶어서요. “라고 말하니 다른 운동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물론 특별히 운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집에서 턱걸이나 푸시업 정도만 하는 수준.


몇 마디씩 주고받은 뒤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내일의 나는 시작하지 말아야 할 수많은 거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찌어찌 3개월치 관비를 바로 결제했다.

이제 시작이다.


거만과 겸손 사이.


스트레칭을 알려주신 뒤 줄넘기를 1분만 뛰어보라고 하셨다. 아직 30대 초반이고 기초체력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나는 고작 1분은 너무 짧지 않나 하는 거만한 생각을 갖었다. 1분 뛰고, 1분 쉬고, 1분을 다시 한번 뛰던 순간 나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강이 쪽 근육이 돌같이 굳어가는 느낌이랄까.

돌이켜 보면 복싱을 배워나가는 모든 순간에 이런 거만한 정신이 있었고 이를 겸손으로 승화시키면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그 후 이틀이 지났다. 며칠 줄넘기 좀 했다고 정강이 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원투를 알려주신다는 날이었고 아파도 나가서 배우고 싶었다. 내 머릿속엔 이미 멋있게 쉐도우 복싱을 하는 내가 가득 차 있었다. 어퍼컷, 훅, 샌드백 치기 등 빨리 배우고 싶어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원투,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지만 상대를 타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술. 관장님은 원투만 잘해도 복싱은 다 배운 것이라고 하셨다. 화려한 UFC 선수들의 타격전만 보던 나는, 이제 입관한 지 3일 차의 나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이런 투박하고 쉬운 게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지금 현시점에 감히 내가 느낌 원투는 선수가 아닌 이상 평생해도 어려울 것 같다.)


 몇 주가 지나고, 한 달 조금 넘게 줄넘기와 원투 연습만 했다. 빨리 잘하고 싶었던 나는 게으른 평소의 나답지 않게 퍽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조금은 오버페이스였던 기억이다.


어느 날 관장님이 말하셨다 너무 잘하려고 무리하지 마라고 하신다. 한 시간이 조금 넘으면 마무리하고 가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그냥 꾸준히 하면 다 잘할 수 있다고.

아마도 그 시절 나는 나 한 번에 모든 것을 습득할 수 있다는 거만함에 빠져있던 것 같다.

나같이 초반에 열정을 불태우다가 그만둔 관원을 얼마나 많이 보셨을까 싶다.


'그래 찬찬히 해보자'. 생각했다.


쉬지 말고 뻗어!


입관하고 두 달쯤 되었을 까, "A야 얘 좀 잡아줘." 관장님이 체육관에 오래 운동하신 형님과 스파링을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물론 '잡아주기'라고 관장님이 사용하시는 지도 스파링을 부르는 말이다. 실력차이나 체중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끼리의 스파링으로, 못하는 사람은 보통 배웠던 것들을 실전에서 녹여볼 수 있는 기회이고 잡아주는 사람은 상대가 다치지 않을 만큼 견제하되 회피, 방어, 게임운영을 연습한다.


무지해서였을까, 고작 두 달을 열심히 연습했던 그 당시의 꽤나 거만한 나는 머릿속으로 이길 수 있는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이미 상상 속에서는 마이크 타이슨이 되었다.


링 위에 오르고 이내 공이 울리며 3분이 시작되었다.

터치글러브.

심장박동이 내 머릿속까지 울리는 느낌이다.

관장님은 나에게 배운 거 활용해서 최대한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하신다.

상대방은 이 좁은 링에서 어찌나 나에게 멀어져 있는지 닿지를 않는다. 더 붙어서 세게 해도 된다는 관장님의 말에 쉼 없이 주먹을 뻗었다. 나를 상대해 주시던 분은 가드를 굳건히 올리고 내 주먹을 받아내고 회피만 하셨다.

체력이 다 방전된 느낌이었다. 왜 공이 다시 울리지 않는지 생각했다. 남은 시간을 보니 2분. 이미 내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고 내 글러브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링안과 밖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지친 나를 보신 관장님은 상대해 주시는 분에게 내 주먹이 나오지 않으면 때리라고 주문하셨고 이내 복부와 안면을 맞기 시작했다. 물론 죽을 만큼 세게 때리지는 않았지만 맞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통증, 무의식적으로 참아 버리는 호흡 때문에 그냥 서있어도 숨이 찼다. 여기저기 날아드는 펀치에 정신도 물론 없었다.


관장님은 말했다. "맞기 싫으면 계속 뻗어."

맞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 밖에 없다. 다음 공이 울릴 때까지 쓰러지지 않으려면, 그저 맞고만 있지 않으려면 주먹을 뻗어야 한다. 숨이 차더라도. 팔이 높게 올라가지 않더라도.

그렇게 3분이 지나 공이 울렸고 바닥에 쓰러졌다.

어쨌건 버텨냈다는 성취감과 잘했다는 관장님의 한마디 그리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나른해진 근육 곳곳에서 느껴지는 개운한 느낌. 마지막으로 불과 3분 전 거만했던 나에 대한 반성과 겸손. 3분 만에 나는 수많은 감정을 느꼈고 조금은 더 복싱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현재 시점으로, 복싱을 한지도 2년이 되어간다.

관장님 말처럼 어느 시점 이후로 더 잘하려고 무리해서 노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픈 곳이 생기면 잠시 쉬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원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게으르게 그리고 욕심과 조바심을 버렸다.

하지만 꾸준히 했다. 운동 겸 취미 겸.

살면서 처음 땀을 흘리고 숨이 차오른 뒤 널브러졌을 때 느끼는 그 개운한 감정을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할 때마다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첫 스파링을 했던 때와 생활체육대회에 나가 1전을 치른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작은 인생이 담긴.

 

어쩌면 복싱은 작은 인생을 담아 놓은 것 같아 매력적이다. 거만하고 편협한 생각을 같던 젊은 시절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며 마주하는 시련과 실수를 통해 더 멋있는 인격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은 내가 복싱을 하며 첫 원투를 배우고, 스파링을 할 때처럼 인생에서는 죽을 때까지 크고, 작게 이어지겠지만 말이다. 이런 과정들에서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거만하고 편협한 시선으로 산다면 다음 스파링에서도, 그다음 스파링에서도 성장은 없다.


삶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복싱경기를 할 때와 같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상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순간은 없다. 가끔은 코너에 몰려 두들겨 맞을 때도 있을 것이다. 계속 주먹을 피하는 것도 것도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맞고 피하기만 하고 있으면 상대는 더 차분히 내 빈 곳을 노린다.

무서워도 상대를 보고 힘들어도 뻗어야 한다. 원투 원투.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더 높일 수 있도록.

인생이라는 한 라운드에서 버틸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유튜브를 24시간 끊으면 일어나는 작은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