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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Jan 25. 2022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2부 - 챕터# 17. 마츠이는 무토가  싹싹 비는 모습을 상상했다.

    눈앞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무토는 바이크의 전조등조차 켜지 않았다. 오로지 흐린 달빛과 감각에만 의존한 채  달리는 중이었다.

    리쿠오가  갈림길에 도달했다. 왼쪽이 야전병원이 있는 미찌나 방향이었고, 계속 직진하면 카마잉이라 불리는  소수부족의 마을이었다. 어디로 향할지는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무토는 위병소를 통과하던 마츠이의 뒷머리를 발견했을 때부터 하나의 이미지에 완전히 사로잡혔었기 때문이었다.


    지옥의 .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마츠이의  이름이었다. 십 대  후반의 소녀들을 납치해서는 온몸에 칼집을 내어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는 공간. 마츠이에게는 천국이겠지만 소녀에게는 지옥인 피의 .

무토는 어둠으로 뒤덮인 흙길을 직진하며 속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무토의 머릿속에는 핏물에 적셔 놓은 것처럼 온통 붉은 여자의 이미지가 들어차 있었다.



    새벽 02시 12분. 지대 구급차가 카마잉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마을 광장에 있는 불교 사원을 중심으로 삼각 형태의 지붕을 이은 전통 초가집이 늘어서 있었다. 사원을 지난 지대 차량이 초가집 사이로  좁은 흙길에 들어섰다. 엔진음과 차량 불빛에 놀란 황소와 염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사방에서 개들이 어댔다.  천천히 이동하던 지대 차량이 마을 뒤편 산비탈에 도착했다. 이층짜리 나무집 앞이었다. 나무 널판으로 뚝딱 지은  집은 보급물자를 수송한 군속들이 다음 수송 때까지 머무르는 숙소였다

    마츠이가 고개를 돌려 수송 칸 바닥에 누운 여자를 쳐다봤다. 초연히 잠든  얼굴을 보자 기무라가 무토에게 했던 말이 겹쳐졌다

무토! 우리 황군의 대승을 부탁한다.

    이어 꾹꾹 눌러왔던 그간의 수모가 전부 떠올랐다. 무토가 수색대대에 소속된 후부터 마츠이는 무토를 기무라 대좌에게서 떼어낼 날만 기다려 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하지만  기회란  무토의 정혼녀가  줄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마츠이는 시간을 끌면서 여자를 천천히 죽여갈 작정이었다. 

진격의 날에 선봉을 서? 네까짓 게 뭔데? 더러운 조센징 돼지새끼가?


    상상은  다른 상상을 불러왔다무토가 이마를 땅바닥에 처박고 싹싹 비는 모습이었다 여자를 살리기 위해서…. 그러자 무토를 마구 짓밟는 도취감에 아랫도리가 벌써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마츠이는 무토의 결말이 어떨지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웠다. 여자를 제물처럼 갖고 놀 때 무토가 제발 반응해주기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반응이란 게 무엇인지에 따라 무토를 죽일 수도 있었기에. 

    무토의 기억이 떠올랐다면 놈은 제거 대상일 뿐이니까. 


 

     짖는 소리에 군속 안 씨가 에서 깼다. 개들이 일제히 짖는다는  외부에서 누군가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안 씨의 가슴께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량의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앞에서 멈췄다. 안 씨가 미닫이 나무 창을 통해  눈만 빼꼼히 밖을 내다봤다. 장교로 보이는 일본군  명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차량 불빛에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안 씨의 불안한 가슴 구석에서는 이미 그 실체를 가늠하고 있었다. 오밤중에 여길 찾을 자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장교가 1 출입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혹시나 아니길 하는 바람으로 안 씨가 지체 없이 달려갔다. 걸쇠를 풀고 문을  안 씨가 마츠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예상했던 그 실체를 마주치자마자  안 씨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 들어섰고 이빨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마츠이가 안 씨를 밀치고 들어섰다. 안 씨의 시야에 병사  명이 지대 구급차에서  것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불 켜"

    마츠이의 명령 투에 안 씨가 재빨리 1층 방 곳곳에 촛불을 켰다. 성냥을 긋는 안 씨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안 씨가 딱딱한 조선식 일본어 발음으로 느리게 말했다. 마츠이가  집에 왔다면 목적은 하나였다.

    난도질. 

    마츠이는 직접 사냥감을 구하지 못했을 경우 미군 군용 칼인 케이바로 군속들을 위협하곤 했다. 1엔짜리 지폐 몇 장을 던져주며 여자를 구해오지 않으면 네가 죽을 거라면서. 다만 마츠이는 군속이 멀디 먼 마을까지 뒤져 여자를 구해 왔을 경우에는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린 여자들이 죽어나가면 영영 그 짓을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츠이는 지폐를 더 얹어주고 치료약을 주며 군속이 구해온 어린 여자를 돌려보내곤 했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입을 놀리면 가족들을 다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두 병사가 들 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들 것은 보나 마나 마츠이의 오늘 밤 제물일 것이다. 안 씨는 직접 여자를 구해오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병사 둘이 들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촛불 아래로 정혜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 씨는 정혜의 얼굴을 알아봤지만 절대로 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원하는 것만 들어주고 눈과 귀를 닫으면 끝날 일이었다. 안 씨는  조선 땅의 아내와 셋이나 되는 자식들의 얼굴을 마음속에 되새겼다.

    "이층 방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사이 본국에서의 보급물자 수송 물량이 줄어들면서 군속들의 일도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안 씨도 조선 여성들을 태우고 와서는 다음 보급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앞장서"

    안 씨가 촛불 하나와 상냥 갑을 들고 2층 계단을 올라갔다. 1층이 부엌과 다인실 큰 방으로 구분된 반면 2층은 작은 방 세 개로 나뉘어 있었다. 안 씨가 복도 맨 끝 방의 문을 열고는 두 세 곳에 촛불을 켰다. 나무 틈 사이로 응고된 피비린내 때문에 군속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방이었다. 자연스레 마츠이의 전용 방이 돼버린 셈이었다. 지옥의 방이란 이름이 붙은 그 방이.

    나무 침대 위에 개어놓은 침대보와 이불, 두 칸짜리 작은 서랍장, 1인용 탁자와 나무 의자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츠이가 들어섰고, 병사 둘은 들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박아둔 술은?"

    "양키 놈 럼주를 빼돌렸습니다. 바로 올리겠습니다."

    "대마초도 가져와."

    마츠이가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던졌다. 점령국인 일본 대본영이 발행한 버마 짯 지폐로 화폐 가치는 엔화나 달러에 비해 수십 배는 떨어지는 것이었다. 안 씨는 지폐를 받자마자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대마초를 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대마를 재배하는 원주민 부족장을 찾아가 깨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약 20여분 후 안 씨가 짯 지폐 뭉치의 반을 떼어주고 얻은 대마초와  궐련을 말아 필 수 있는 종이, 럼주병, 나무 술잔을 챙겨 들고 이층 계단에 올라섰다. 두 명의 병사는 소총을 메고 복도 입구를 막고 있다가  비켜섰다. 안 씨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침대 위로 옮겨진 정혜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웃통을 벗은 마츠이가 막 여자 팔에다 아편 주사를 찌르는 참이었다. 정혜가 얕은 신음을 뱉으며 꿈틀거렸다. 안 씨는 잠에서 깬 정혜가 자기 얼굴을 알아볼까 봐 얼른 쟁반을 내려놓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거의 달리다시피 1층 부엌으로 내려온 안 씨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긴장이 풀린 다리는 제대로 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날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딱 한번 목격했던 지옥 방의 처참한 광경이. 온통 붉은 피로 범벅이 된 소녀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내질렀고, 그럴수록 마츠이는 더없이 흥분된 표정으로 슥슥 살점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안 씨는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눈을 감았다. 벌써 정혜의 외된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도 몸이 떨리자 안 씨는 아예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숨을 멈췄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 씨의 둥그레진 두 눈이 그와 마주쳤다. 순간, 심장발작이라도 걸렸을 만큼 헉!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츠이를 봤을 때보다 더한 두려움이 안 씨를 덮쳤다. 귀신, 불사신, 악령... 다 이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무토가 안 씨의 목을 움켜쥐고는 출입문을 통과해 부엌 벽까지 밀어붙였다. 다른 쪽 손은 안 씨의 입을 막은 채였다. 무토는 이층의 기척에 집중했다. 발소리와 함께 나무 널판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십 초가량 계단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무토가 안 씨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모른 척하라는 의미였다. 안 씨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무토가 이층을 향하는 첫 계단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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