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순례와 남은 생각들

by 익호

해마다 봄이 오면 옛 동네를 보러 나선다. 태어난 곳에서 새 계절을 맞이하며 희망과 각오를 다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가 붙은 것은 아니다. 벚꽃 봉오리가 올라오고 바람도 포근해질 무렵이면 그저 올해도 가 볼까,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지도 않게 들곤 하는 것이다. 평일 한산할 때를 골라 지금은 이름이 바뀐 역에 내려 옛 동네를 거닐면서, 기억의 단서가 남아있는 곳을 찾아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온다. 이 혼자만의 연례행사도 돌이켜 보니 십 년을 훌쩍 넘었다.


태어나 스무 해 넘게 살았던 동네는 찾아갈 때마다 변하고 있다. 살던 단지, 사촌네가 살았던 단지 모두가 부수어져 높다란 부의 숲으로 변했고, 추억이 남은 건물 중에서 옛 자취가 남아 있는 건 이제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초등학교 건물은 예전에 재건축되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아직 남아있지만 외부인으로서는 출입도 자유롭지 않으니, 내 연례행사의 방문 리스트도 매해 초라해지고만 있다.


7-80년대 건축 스타일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규격화라는 게 적용되긴 한 것 같은데 어째 동마다 층마다 미묘하게 어긋난 데가 있는 투박함에 난 묘한 편안함을 느낀다. 상가 건물들은 특히 더 그러하다. 같은 건설사에서 지은 건물인데도 어찌나 천태만상들인지. 2000년대 이후 지어진 치밀하고 깔끔한 건물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다.


어릴 때 다녔던 피아노 학원도 아마추어 토목꾼이 빚어 놓은 듯한 상가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아주 잠깐 다니고 관두긴 했어도, 기억의 밀도는 높은 편이다. 강렬한 경험을 했던 곳이기에 그럴 것이다.

처음부터 학원에 거부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 학원에는 유독 히스테릭한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무섭다기보다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당시는 아직 아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부족한 시대였지만,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또 다른 까다로움을 가진 타입. 어떤 날은 더없이 상냥하게 대해주시는가 하면, 무언가 수틀린 날에는 귀신처럼 소리를 질러대어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예측 불가능한 종류의 까다로움 말이다. 그날의 희생양이 잘못된 음을 짚기라도 하는 날에는, 고사리손을 휙 낚아채서는 건반에 내려치며 혼내는 소리가 레슨실 밖으로 울려 퍼지는 일도 예사였다.


그게 미야? 도!잖아 도! 도! 도!


어린 나는 산만한 성정이었기에, 학교든 학원이든 준비물을 안 챙겨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더랬다. 그날 역시 그러했다. 이론 학습에 필요한 연필을 또다시 안 챙겨 간 것이다. 매일같이 목격해 온 분위기에 이미 위축될 대로 되어서였을까, 옆에 앉은 아이에게 빌리려는 생각조차 못한 채, 바닥 어딘가 굴러다니던 빨간 색연필을 주워다가 겨우 답을 적어 검사를 받으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당연하게도…


누가 책에다가 색연필로 쓰라디? 그것도 빨간색으로! 제정신이야?


눈앞에서 색연필이 두 동강 나는 그 순간, 난 학원이라는 공간에 완전히 정이 떨어졌던 것 같다.


돌아오는 등원일에 처음으로 시도한 외도는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아파트 단지를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다 문방구 앞에서 뽑기라도 하다 돌아왔었던가. 그러나 첫 경험임에도 그다지 짜릿하지도 않았던 일탈은 금세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

다음번 등원일엔 학원 문 앞까지 가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기만 하는 내가 있었다.


들어가야 하나? 지금이 좋은 타이밍일까? 눈 딱 감고 들어간다면, 저번에 빠진 걸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만약 혼내신다면? 분명히 혼나겠지.


형광등 불빛도 잘 안 닿는 상가 계단실에 우두커니 앉아서 다음에 올라오는 아이를 따라서 들어가야지, 하고 마침내 용기를 내 보지만, 그 결심은 나를 문 앞까지 이끄는 게 고작일 뿐이었다. 수없는 도전과 포기를 거듭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학원이 파할 때가 되자 이제는 포기하고 돌아서는 것 외에 별 수가 있었을까.

그날 이후로는 학원 근처로도 가지 않게 되었다. 악보가 든 보조 가방을 챙겨 들고 옆동네 단지까지 피신해서는 어서 시간이 가지 않을까, 이따가 집에 들어갔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기약 없는 고뇌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 치고는 나름 치밀했던 것도 같다. 분명 한 달 혹은 조금 더 버틴 것으로 기억하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다.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유난히 얼어붙던 나를 의아해하던 어머니가 마침내 학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고, 그날부로 내 일탈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예상 밖이었던 것은 누구도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머니조차 ‘정말 안 다닐 거지?’ 한 마디만 덤덤히 물어온 것이 다였다.


피아노가 화두에 다시 오른 것은 그로부터 오 년은 더 지나서의 일이다. 중학생이 된 내게 어머니는 ‘이제 정말로 다시는 피아노를 칠 생각이 없니?’ 하며 몇 번이고 다짐하셨다. 질문의 의도는, 거실에 딱 한 대 남아있던 할아버지의 피아노를 처분하기 위해서.

무겁기도 무거웠던 새까만 피아노. 조율 한 번 제대로 안 받아 음이 다 나가있던, 그러나 울림만큼은 훌륭했던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피아노. 그 가치가 얼마에 매겨졌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옆 동네 우성원으로 가 그것을 모두 기부하셨다. 당시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을 텐데,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을 생활비 따위로 전부 흩어버리고 싶지는 않으셨던 것이리라.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피아노와의 공식적인 인연은 끊어졌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완전히 끊었다 여긴 것은 아닌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실에 책을 놓고 왔다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열쇠를 얻어서 그랜드 피아노를 만져보러 들어가기도 했었고, 다니던 교회에서 쳐 보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일종의 여흥이었을 뿐, 피아노를 다시 마주하겠다는 진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요 몇 년 전, 서른이 넘어서다.


지난 봄에도 옛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왔다. 올해는 어린 시절 내 행동반경이었던 단지들 중에서 무려 세 군데의 재개발이 한꺼번에 확정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들떠 환영하는 시대의 룰이 서글프게만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옛 피아노 학원이 있던 상가는 송두리째 사라져 그 자리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주변 동네 풍경에서도 어디 하나 당시와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봄마다 발길을 끊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부조리라는 외압을 핑계로 댔지만 사실은 스스로가 선택해서 떠났던 피아노 학원, 그리고 영영 잃었을 기회들. 어떤 어른이 한 번쯤은 내가 바라볼 곳을 똑바로 가리켜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게 남아서일까.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허상이었을 확률이 훨씬 높은 서사를, 이제 와서 붙잡기라도 하고 싶다는 걸까.


나를 길러 준 어린 시절의 풍경은 그 주재료가 콘크리트였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단단하지는 못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파트 단지도 수년 내에는 재개발이 추진될 것이고, 다른 모든 곳들이 그랬듯 기억의 무덤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풍경이 사라진 이후의 봄에도 나는 옛 동네를 보러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남을 텐데, 거기에는 의외로 강한 확신이 있다. 반드시 그러리라는 생각이 든다. 투박한 콘크리트 건물도, 플라타너스 가로수길도, 학원도 피아노도 어린 나도 그곳에는 벌써 전부터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마다 찾아가고 있는 나다. 완전히 꺼버렸다 생각한 불씨가 삼십여 년 뒤에 홀연히 다시 타오른 것처럼, 사그라드는 와중에도 다시 돌아오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추억의 단편에 덧붙인 변변찮은 감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나아가는 길을 밝히는 빛이란 대체로 그런 모호한 광원에서 비롯되는 것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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